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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효부문 (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정선전씨는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의 효부이다.본관은 정선(旌善). 승정원좌승지에 증직이 된 김우(金瑀)의 부인이다.정선전씨(旌善全氏)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잘 지켜 부모를 효로 대하고, 여필종부(女必從夫)로 집안의 화목에 힘써 인근의 본보기가 되었다. 부모님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거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나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수발에 온 정성을 쏟는 한편 신령님께 정화수를 떠 놓고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었다. 또한 오랫동안 누워 있는 시아버지를 목욕시키고 이도 잡아드렸다.몹시 추운 날 병석에 누운 시아버지가 참외와 참새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전씨는 한겨울에 어디서 참외를 구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다..
경주인 김극태의 처인 의령남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5년(1867년)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여 그가 살던집 대문에 편액하였던 정문이다. 정려건축은 마을입구에 독립된 목조정각으로 세워지는 경우와 가옥의 대문간을 정려로 하는 2가지 유형이 있는데 의령남씨 효부문과 같이 가옥의 대문을 정문으로 하는 경우는 충북지역에서는 흔치않는 유례이다. 현재는 집은 없어지고 편액이 걸린 대문만 보존되고 있다. 대문은 정면 3칸 측면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고 양측의 1칸씩은 행랑으로 온돌방을 시설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구조는 낮은 시맨트 기단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위에 방형의 기둥울 세웠다. 현재 "효부사인김극태처의령남씨지문(孝婦士人金極泰妻宜寜南氏之門)이란 명정편액이 솟을대문..
조선(朝鮮) 순조(純祖) 3년(1803)에 명정(銘旌)된 정려(旌閭)로서 효부(孝婦) 전주리씨(全州李氏)의 아름다운 효행(孝行)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된 정려(旌閭)이다.마을 회관 바로 옆에 느티나무 보호수와 같이 위치하고 있는데, 맹동 마을로 들어서는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하여 보호수와 어..
증숙부인(贈淑夫人) 안동 김씨는 청원군 북이면 선암리 1구 풍천임문(豊川任門)으로 시집 온 조선조 효부이다.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 임시대(任時大)의 아내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집와서도 시부모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니 칭송이 자자..
북이면 용계리에 있는 이 효부각은 1979년에 이호익(李浩益)의 부인 곡산 연씨의 효행을 기리어 전주 이씨 문중에서 세운 정려로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부문 편액을 걸었다. 그 앞에는 일각문을 세우고 주위에 담장을 둘렀으며, 1974년에 세운 기적비가 있다. 이 효부각은 1979년에 이호익(李浩益)의 처 곡산 연씨(1900~1960)의 효행을 기리어 전주 이씨 문중에서 세운 정려로서 정면 1간, 측면 1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효부문 편액을 걸었다. 그 앞에는 일각문을 세우고 주위에 담장을 둘렀으며, 1974년에 세운 기적비(紀蹟碑)가 있다. 이 효부문은 북이면 용계리 마을초입에 자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