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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면 광전리박현종효자문(甘勿面 光田里朴顯鍾孝子門) 본문
박현종(朴顯鍾) 1767(영조 43)~
자는 사심(士心), 호는 어우당(於于堂), 본관은 함양으로 통덕랑(通德郞) 박순화(朴淳和)의 아들이다.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읜 후 그 얼굴을 모르는 것을 항상 안타까워하면서 어머니 없는 아이를 보면 눈물을 흘리고, 부모가 모두 있는 사람을 보면 스스로 상심하였다.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으나 부지런히 노력하여 아버지가 좋아하시는것을 갖추기에 힘썼다. 또 간혹 별미(別味)를 얻으면 반드시 가져와 아버지에게 드렸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할 때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할 것을 빌었으며, 또 등창이 매우 심했을 때는 의원이 “종기의 독이 깊고, 너무 나이가 많아 침술을 시행할 수 없으니 입으로 종기 부위를 빨아내는 것이 좋다.”라고 하자 그 날부터 밤낮으로 수개월 동안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1840년(현종 6년) 정려되어 감물면 광전리 광지실마을에 정려문이 있다.【참고문헌】 『괴산군지』
이 정려각은 효자 박현종(1767~ ? )의 정려로 헌종(憲宗) 6년(1840)에 세운 것이다.
박현종은 자는 사심(士心), 호는 어우당(於于堂),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 찬성(贊成) 박세영(朴世榮)의 9세손이며 통덕랑(通德郞) 박순화(朴淳和)의 아들이다. 3세에 모친을 여의고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갖추기에 힘썼으며, 간혹 별미를 얻으면 반드시 부친에게 가져다 드렸다. 부친이 병으로 위독해져서 의원이 말하기를 “이미 종기의 독이 뿌리를 깊이 내렸는데 너무 노경이라서 침술로는 할 수 없으니 입으로 상처를 빨아냄이 좋겠다” 하여 수개월을 빨아내니 효험이 있어 5년을 더 연수하였다. 이로 인해 정려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효자각 안에는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朴顯鍾之門”
이란 편액을 걸고, 일각문에 「咸陽朴氏於于堂公汪孝門」이란 현판을 달았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광전리 마을회관옆에 자리하고 있다
박현종(朴顯鐘) 효자각(孝子閣)
선생의 자(字)는 사심(士心) 호는 어우당(於于當),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 찬성(贊成) 박세무(朴世茂)의 9대손으로 조선조 영조43년(1767) 통덕랑(通德郞) 순화(淳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살때 모친을 여의고 성장하면서도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없는 아이를 보면 눈물을 흘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을 보면 상심(傷心)하기도 하였다. 집안이 극히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으나 낮이면 밭을 갈고 밤이면 글을 읽어 가면서 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모든일에 힘썻으며 간혹 별미(別味) 를 얻으면 반드시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아버지가 종기가 생겨 위독하게 되니 목욕후 하늘에 자기로 대신할 것을 빌었으며, 병이 더욱 위독하여 의원이 말하기를 "이미 종기의 독이 뿌리를 내렸으니 너무 노경(老境)이라서 고칠수 없으니 입으로 빨아내라" 고 하여 여러날 거듭한 결과 그 정성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부친의 병도 점점나아 그후 5년을 더 생존하였다. 거룩한 효행이 널리 전해지자 상감께서도 효자문을 건립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고 동몽교관(童蒙校官)이라는 직함을 내리셨다. 이 효자각은 조선조 헌종 6년(1840)에 세웠으며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맛배지분 기와집이며 일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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