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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면 소암리 유근 신도비(沼壽面 沼岩里 柳根 神道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소수면 소암리 유근 신도비(沼壽面 沼岩里 柳根 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5. 25. 13:40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에 위치한 조선중기의 학자인 유근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왕이나 종이품 이상의 관리들의 무덤가에 그들의 생전의 업적을 기린 비를 말한다.

 

유근은 1549년(명종 4)∼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
유영문(柳營門)의 아들이며, 진사 유광문(柳光門)에게 입양되었다.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다. 사마시를 거쳐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다. 이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그를 맞았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하여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임금을 호종하면서
예조참의좌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593년
도승지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밖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3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온조묘(溫祚廟)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경을 농단하고 1613년(광해군 5) 폐모론까지 일어나자, 괴산으로 물러나고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에서 죽었다. 괴산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서경집》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