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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가신리 홍차기효행비(老隱面 佳新里 洪此寄孝行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노은면 가신리 홍차기효행비(老隱面 佳新里 洪此寄孝行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2. 19. 09:44

 

 

 

홍차기는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여(養汝). 모당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홍만최(洪萬最), 조부는 홍문관교리 홍중현(洪重鉉), 아버지는 홍인보(洪寅輔)이고, 어머니는 수원최씨이다.

홍차기의 효자비는 가신리 양지바른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보존상태는 열악하며 관리의 손길이 필요하다

 

 

 

 

 

홍차기(洪此奇)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홍인보는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수원최씨홍차기가 열 살이 되자 부자간에 상면이나 시키고자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비로소 알려 주었다. 홍차기는 크게 놀라며 즉시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 옥중의 아버지를 만나고 통곡하니 보는 이가 모두 애처롭게 여겼다.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일렀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고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관가에 호소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그 효성의 소리가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직접 옥사를 처결하니 홍차기의 아버지는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영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결도 사실은 억울한 일이었다. 홍차기는 아버지의 죄가 완전히 사면되도록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 유배지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천여 리를 수없이 오르내리며 형조에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다 객지에서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이러한 홍차기의 지극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왕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죄를 풀고 석방하였다. 그러나 홍차기는 아버지의 석방 사실도 모르고 병석에서 신음하다 뒤늦게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풀려난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에 감사드린 후 조용히 숨졌으니 이때 그의 나이 14세였다.

 

 

 

홍차기의 지극한 효성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울 것을 명했으나 정문이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1795년(정조 19) 당시 충주목사였던 이가환(李家煥)이 내용을 쓴 비석과 보호각을 정려와 같은 형태로 세웠는데, 현재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다.

 

 

홍차기의 효행을 찬한 비석의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효자풍산홍차기비(孝子豊山洪此奇碑)>


홍씨(洪氏)성의 동자는 아름이 차기(此奇)요, 아버지는 인보(寅輔)인데 법에 걸려 한 달에 세 번 곤장을 맞아서 살 속이 터질 정도였는데 아이가 막 밥을 먹다가도 용하게 알고 부르짖으며 뒹구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원통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눈물이 마르고 피가 다하여 목숨이 쇠약해지더니 마음속 응어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죽어 돌아 왔다.

아이가 이에 표연히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올라가 신문고를 울리고 여러 해 동안 대궐 문을 지키고 있었다. 봉두난발을 하고 다리에는 굳은살이 박이니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혹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머리의 이와 서캐를 잡아 주기도 하였다.

이 해에 큰 가뭄을 만나 혹시 죄가 의심스러운 죄수가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대신이 이를 말하자 왕은 “아! 본도에 명령을 내려 증거가 없는 말인지 깨끗하게 살피라.”고 하셨다.

아이는 자기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분주히 다니며 역마가 갈 때나 역마가 올 때나 모두 앞장을 섰는데 90리도 이르기 전에 병이 이미 위독한 상태였으나 기어서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자비를 구하였다. 은혜로운 말씀이 비로소 내려왔지만 기운은 실낱과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읽어주니 듣고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아버지! 아버지! 살게 되었습니다.”라 하고는 잠시 후 눈을 감고 마침내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옥에 들어갈 때 아이는 태중에 있었고 아버지가 옥에서 나옴에 이르러서는 아이가 상여에 있었다. 14년간 하늘이 실로 쇠퇴한 풍속을 안타깝게 여겨 그로 하여금 붙잡아 지탱하도록 한 것이니 아! 슬프구나, 사람의 모범이 여기에 있도다.


지금 임금(정조) 19년 을묘(1795년) 10월 일

자헌대부 행 충주목사 여흥(驪興) 이가환(李家煥)이 글을 짓고 쓴다.

 

 

 

孝子豐山洪此竒碑」

洪姓童子名此竒父曰寅輔文法罹月三栲㮄肉中悲兒方」

口食聖得知叫呼宛轉輒如期母訟父寃走亰師淚枯血盡」

命之衰視不受含旅復夜兒乃飄然不父辭撾鼓經秊守」

天扉蓬髮繭足觀者噫或與之餌去虱蟣會歲大旱慮」

囚疑貴臣爲言 王曰咨飭令本道淸單辭兒不量力」

爲奔馳驛往驛囘皆先之未至三舍病已危匍匐詣 闕」

冀 聖慈恩言纔降氣一絲傍人讀聽倐躍而父兮父兮」

生矣㢤已而瞑目遂大歸方父入獄兒在胚比父出獄兒」

在輀十四秊間天實爲如憫衰俗俾扶持吁嗟人式其在斯」

上之九秊乙卯十月 日」

資憲大夫行忠州牧使驪興李家煥撰並書」

 

 

홍차기의 효행을 기린 홍차기의 비석을 지은 이가환은  1742년에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주. 자 정조(廷藻). 호 금대(錦帶) ·정헌(貞軒)이다. 성호 이익(李瀷)의 종손으로 학문의 깊고 넓어 남인 실학파의 중심에 있었으며 실학자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미쳤다. 1771년(영조 47) 진사시, 1777년(정조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 ·개성유수 ·형조판서에 올랐다. 채제공(蔡濟恭)을 이어 남인 중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정국은 노론에 의해 주도되었고 남인을 견제하는 공격이 이가환의 목숨을 노렸다. 이가환의 증조부는 숙종 때 노론을 공격하다 처형당한 이잠(李潛 1660∼1706)이며 이런 집안의 내력은 두고두고 노론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가 한때 천주교를 신봉하였다고 집중 공격되었고, 결국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 노론 벽파가 중심이 되어 시파(時派)를 숙청하고 천주교를 탄압할 때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784년 생질인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등 주위 인물들 사이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될 때 이벽(李檗)을 통해서 천주교를 접했다. 이벽은 남인을 이끄는 거두였던 이가환을 천주교인으로 이끌기 위해 그를 설득하였지만 천주교인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벽을 설득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가사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전파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였으나 노론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1792년 정조가 서양의 과학과 문명에 밝은 이가환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였으나 노론의 끈질긴 상소로 사퇴하였고 개성유수(정2품)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그의 천주교 이력을 문제삼는 노론의 공세가 점점 심해지자 1795년 충주목사로 임명되어 천주교를 배척하면서 자신에게 씌어진 공격의 빌미를 벗기위해 노력했다.

이가환은 문장에도 뛰어난 당대의 학자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밝아 일식 ·월식이나 황도 ·적도의 교차 각도를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수준에 이르렀다. 정조는 그의 재능을 아꼈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여 유생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나 노론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실학자 정약용은 그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는 《금대유고》가 있으나 대부분의 저술은 없어졌다.[네이버]

 

 

 

 

 

 

 

 

홍차기의 이야기는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그의 문집에 전하는 실화로서,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졌고

드디어는 1948년에는 임운학이란 영화인이 주연과 감독을 맡아 ‘홍차기의 일생’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홍차기의 일생은 1948년 태양영화사(太陽映畵社)에서 만든 16mm 무성영화로, 임운학(林雲鶴)이 기획·감독·편집·주연을 맡고 35만 원 가량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다. 1948년 4월 28일 우미관(優美館)에서 개봉되어 5만 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는 홍차기의 효성을 그린 극영화이다.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를 감독한 윤백남(尹白南)이 각본을 썼고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자 옥바라지를 위해 구걸을 하던 홍차기는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양으로 올라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어느날 대제학의 행차를 목격하고는 길을 가로막고 대제학에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대제학은 홍차기의 효성에 감탄하여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고 감옥에서 풀어줄 것을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