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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報恩)의 유래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보은(報恩)의 유래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8. 9. 22:06

은혜를 갚는다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보은군은 오랜 옛날 삼국시대만 해도 삼년산군(三年山郡) 또는 삼년군(三年郡)이라 칭했다. 서기 470년 신라 제 20대 자비왕 13년 보은읍 동쪽 4km 지점에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 이름했는데 전설에 의하면 삼년만에 쌓았다고 삼년산성으로 칭하였다고 하며 삼년산군으로 불리워진 것도 역사에는 삼년산성이 쌓아진 자비왕 13년 경술(庚戌) 서기 470년부터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고려 왕건 태조(王建 太祖) 10년 서기 928년에 보령(保齡)으로 고쳐 부르다가 조선국 제3대 태종(太宗) 6년 병술(丙戌) 서기 1406년에 보은(報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갚을 보(報)자, 은혜 은(恩)자를 붙여 부르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구전되어 온다. 서기 1392년 임신(壬申)년에 조선 국을 창건하여 왕으로 옥좌에 앉은 태조는 슬하에 여덟 왕자를 두었는데 첫째로부터 여섯째아들까지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소생이요, 일곱째, 여덟째 왕자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소생이었다.

태조는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를 책봉하는데 신덕왕후 강씨의 말을 중히 여긴 듯 당시의 상황이 무르익어 가자 이를 눈치챈 조신 중에 개국공신(開國功臣)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씨 소생인 여덟째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옹립할 것을 비밀리에 결의하고 무리를 지어 한씨 소생 왕자들을 제거할 계책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특히 조선국 창건의 지대한 공적을 남긴 바 있는 방원(芳遠)의 심복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위 사건을 세상에서는 이른바 왕자난(王子難)이라고 하는데 그 후 태조의 둘째아들인 방과(芳果)가 정종대왕(定宗大王)으로 대를 이은 다음 다섯째 방원이 태종 대왕(太宗大王)으로 왕위에 오른 다음 태종은 왕위를 에워싸고 벌어진 왕자간의 다툼을 뼈아프게 생각하였다. 특히 조신들간에 왕자를 각기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라져 귀양길에 있던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무참히 자신을 지지하는 무리들에 의해 살해된 데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의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태종은 등극한지 3년되던 해 시자를 시켜 신나 때부터 명찰로 이름난 속리산 법주사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두 왕자 동생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크게 벌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항상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말끔히 가시게 되자 크게 감탄하며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태종은 즉위한지 6년째 되던 병술(丙戌)년 서기 1406년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저정하던 기회에 충청도에 보령이라는 지명이 둘이 있어 중복된다고 개명할 것을 지적하면서 갚을 보자, 은혜 은자를 넣어 보은이라 칭하도록 하명하였다는 것이다.[보은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