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광면 유평리 이문건신도비(文光面 柳坪里 李文楗神道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문광면 유평리 이문건신도비(文光面 柳坪里 李文楗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6. 11. 06:23

 

이문건(李文楗)은 1494(성종 25)∼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발(子發), 호는 묵재(默齋)·휴수(休叟). 이함령(李咸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생(李叔生)이고,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이윤탁(李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이문건의 신도비는 근간에 세운것으로 문광면 유평리 마을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문건 [李文楗]은 일찍이 중형 이충건(李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그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南袞)·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아 1521년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건은 청파역(靑坡驛)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그는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1527년(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승문원박사를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때 전날의 혐의로 대간으로부터 서경(署經)이 거부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협조로 관로는 순탄하였다.

1539년 장령을 역임하며 관기 확립에 힘썼고, 그 뒤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어, 중종의 국상을 맞아 빈전도감(殯殿都監) 낭관으로서 대사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54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고, 이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성품이 근후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23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경사(經史)에 탐닉하고 시문에 힘쓰니, 뒤에 이황(李滉)·조식(曺植)·성수침(成守琛)·이이(李珥) 등이 그의 시문을 즐겨 읊었다 한다.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문건 [李文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의 휘(諱)는 문건(文楗)이요 자(字)는 자발(子發)인데 성주(星州) 사람이다. 상조(上祖) 이장경(李長庚)이 비로소 고려(高麗)에서 현달하여 벼슬이 삼중대광 도첨의 좌시중(三重大匡都僉議左侍中)에 이르렀다. 이분이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을 낳았고, 문열공이 경원공(敬元公) 이포(李褒)를 낳았으며, 경원공이 밀직사(密直事) 이인민(李仁敏)을 낳고, 밀직사가 문경공(文景公) 이직(李稷)을 낳았는데, 그가 비로소 본조(本朝)에서 벼슬을 하였다. 문경공이 좌윤(左尹) 이사후(李師厚)를 낳고, 좌윤이 교리(校理) 이함녕(李咸寧)을 낳았으며, 교리가 첨지(僉知) 이숙생(李叔生)을 낳고, 첨지가 정자(正字) 이윤탁(李允濯)을 낳았는데, 정자가 고령 신씨(高靈申氏)를 맞이하여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 11월 28일에 공을 낳았다. 신씨는 판관(判官) 신회(申澮)의 딸이며 지군사(知郡事) 신중주(申仲舟)의 손녀이다.

공은 태어나자 남다른 기질이 있어 나이 10여세에 여러 서적을 널리 통하고 필법(筆法)은 한 세상에 묘하였으므로 일시의 동배(同輩)들이 추대하며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씨(仲氏) 이충건(李忠楗)과 더불어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에게 학업을 사사 받았다. 정덕(正德)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에는 백씨(伯氏) 이홍건(李弘楗)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중종(中宗)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정암 선생이 화를 당하자 간당(姦黨)들이 으르렁거리면서 날뜀이 더욱 심하고 흉폭한 자들의 기세가 매우 작렬하여 문생(門生)과 친구들도 감히 조문(弔問)과 제전(祭奠)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은 중씨 및 동문 한 사람과 함께 달려가서 예로써 장례를 모셨다. 중씨는 헌납(獻納)으로서 이때 이미 금고(禁錮)를 당하고 있었으며 간당들에게 혹독한 형신(刑訊)을 받고 낙안(樂安)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나 겨우 도문(都門)을 나서자 운명하였고, 공은 과거를 정지 당한 지 무릇 9년이었는데, 정해년(丁亥年, 1527년 중종 22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풀려나서 다음 해 가을에 등제(登第)하였다.

이때에 당화(黨禍)가 조금 풀리자 공은 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었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겼다가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인종(仁宗)이 동궁에 계실 적에 공이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모셨으므로 가장 총애를 입었는데, 일찍이 필찰(筆札)과 관영(冠纓)을 하사하여 총애를 표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35년 중종 30년) 정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정자공(正字公, 이윤탁(李允濯))의 묘(墓)를 옮기어 양주(楊州)의 노원(蘆原)에 합폄(合窆)하였다. 이때에 백씨가 먼저 세상을 떴으므로 그 아들 이휘(李煇)가 승중(承重)하게 되어 공이 그와 함께 여묘(廬墓)하며 정성과 예절을 극진히 하다가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 정월에 비로소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울 서소문 옛집으로 돌아왔다.

4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일찍이 ‘희릉(禧陵, 중종 계비(繼妃) 장경 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의 광중[神穴]의 흙에 돌이 많이 섞여서 당시 일을 맡았던 자가 그것을 숨기려고 다른 산등성이의 좋은 흙으로 덮어 위로 임금의 눈을 속였다’는 말을 듣고서 항상 그가 임금을 속인 부도(不道)한 정상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가, 이때에 와서 논죄(論罪)하려 하자 대신 이하가 모두 어렵게 여겼으나 공은 개연(慨然)히 거세게 논란하여 마침내 그 죄를 바로잡으니, 중외(中外) 모두가 통쾌하게 여겼다. 병조 좌랑(兵曹左郞)이 되었다가 마침내 이조(吏曹)로 옮겼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사축서 사축(司畜署司畜)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이조 낭관이 되었고, 또다시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서 소환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중종 대왕이 승하하자 공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서 빈전도감 집례관(殯殿都監執禮官)에 차임되었는데, 명정(銘旌)을 비롯하여 시책(諡冊)과 신주(神主)가 모두 공이 쓴 것이다. 이듬해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 3월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급되었고 얼마 안 되어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이 승하하고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 형의 아들 이휘(李煇)가 수찬(修撰)으로 여러 현인들과 함께 군흉(群凶)들의 무함을 당하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廸))와 같은 여러 현인들이 있었지만 구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죽임을 당했고 공도 연좌되어 성주(星州)로 귀양을 갔다.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부인이 몰(沒)하자 이듬해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 3월에 성주군 치소 동쪽의 부동(釜洞)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묘소 뒤에 장사지냈는데, 이때 공이 본디 무병하다가 부인을 채 반혼(返魂)하기 전에 졸(卒)하여 그해 3월 13일에 부인의 묘 오른쪽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뒤 선조 대왕(宣祖大王) 초엽에 을사 사화(乙巳士禍)를 당한 여러 현인들은 모두 원통한 누명을 씻어 복관(復官)되고 증작(贈爵)하는 은전(恩典)을 입었으나 공은 미처 보지 못하였으니 아! 비통하도다.

공은 사람 됨됨이가 인자하고 후덕하며 순박하고 근신하여 집에서 거처할 때는 먹을 양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고 오직 글 읽는 것으로만 자오(自娛)하였다. 정자공(正字公)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도 잇따라 세상을 뜨자 공이 홀로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였다. 모부인이 항상 질병이 많아 공이 직접 탕제(湯劑)를 다려 올리되 오랠수록 더욱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의방(醫方)에도 정밀하여 활인(活人)을 매우 많이 하였다. 모부인이 거문고 소리 듣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또 거문고를 배워 평상시에 즐겁게 모셨는데, 모부인이 세상을 뜨자 공의 애훼(哀毁)함은 예제에 지나쳤으며, 매년 기일(忌日)에 제사를 지낼 때면 맛있는 제수를 올리며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제복(祭服)과 기명(器皿)은 따로 한 방에 보관해 두고서 감히 다른 데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골육(骨肉) 중에 부모가 없고 가난한 자를 취하여 양육하였는데, 그 은혜가 비복에게도 미쳤고 혜택이 온 마을에까지 두루 입혀지자 공을 아는 자는 성덕 군자(盛德君子)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귀양살이하던 23년 동안에 한가함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즐기어 조금도 바깥일에 연루됨이 없었고 온종일 조용히 앉아서 경사(經史)를 탐구하는 데에 푹 빠져 있었다. ≪주역(周易)≫과 ≪태극도(太極圖)≫를 가장 좋아하여 모두 손수 베껴서 완독(玩讀)하고 탐색(探索)하느라 어떤 때는 먹는 것도 기피하기까지 하였으며, 여가가 있을 때에는 시를 읊으면서 회포를 달랬다가 더러는 단율(短律)을 짓되 장편(長篇)을 섞기도 하였는데, 절대로 화액(禍阨)으로 곤궁한 것에 시름하거나 두려워하는 형용을 짓는 일이 없었고, 글씨[墨妙]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초서로 쓰기도 하고 해서로 쓰기도 하면서 시원하게 요구에 응해 주었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과 영봉 서원(迎鳳書院)의 향사(享祀)를 의논하느라 서신을 주고받으며 일을 결정했는데, 그 설화가 매우 많다. 자호(自號)를 묵재(默齋)ㆍ휴수(休叟)라 하고 인하여 시를 지어서 그 뜻을 보이자, 퇴계(退溪)ㆍ남명(南冥)ㆍ청송(聽松)ㆍ율곡(栗谷)과 같은 여러 노 선생 및 이름난 사람과 시인들이 모두 그 운으로 화답해서 큰 시집을 만들었는데, 세상에서 보배로 여기는 바가 되었다. 정암 선생(靜庵先生)이 몰(沒)한 뒤에 당시 사우(師友)들의 사실(事實)을 기록하여 ≪기묘록(己卯錄)≫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공의 행적에 대해 쓰기를, “침착 중후하고, 숙성(夙成)하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이 공에 대한 실록(實錄)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으로 증(贈) 승지(承旨) 김언묵(金彦默)의 딸이다. 아들 이온(李熅)을 낳았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이가 첨정(僉正) 이원배(李元培)를 낳았으며, 장녀는 직장(直長) 정섭(鄭涉)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충신인 증 판서(判書)
송상현(宋象賢)에게 시집갔다. 지금 내외손이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집에 전해 오는 말에, “공이 미리 후사 자손(後嗣子孫)의 이름을 15세(世)까지 지어 놓았는데, 각기 그 수가 있고 지금 5, 6세(世)를 내려왔는데도 그 수가 서로 부합되지 않은 게 없으며, 출생하여 수명이 짧은 자에게는 그 이름에 반드시 방점을 찍어 놓았다.”고 하였으니, 공은 아마도 이인(異人)이었나보다. 옛날에도 거의 없었던 일이다.

나의 조모 이씨(李氏)는 고(故) 정헌공(正獻公)
이윤경(李潤慶)의 딸로 공의 모부인과는 외자매(外姊妹)가 된다. 공이 성주에 귀양살이할 적에 정헌공이 목사(牧使)로 있었는데,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지금 정헌공의 서찰(書札)을 공의 자손 집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다. 지금 공의 현손(玄孫) 이하종(李河宗)이 내가 외족이 된다는 까닭으로 가장(家狀)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행장(行狀)을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의 탁월한 자질로 일찍이 참된 유학자를 섬겨 바른 학문을 들을 수 있었고, 또 대성이신 임금님 사랑을 입어서 장차 크게 할 것이 있을 듯하더니, 불행하게도 두 번이나 소인이 군자(君子)의 도를 삭멸(削滅)한 사화(士禍)가 있는 흉운(凶運)을 당하여 전후 30여 년간 금고(禁錮)되었다가 마침내 관직에서 떨어져 적소(謫所)에서 죽고 끝내 가슴에 쌓은 포부를 다 펴지 못하였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오직 세도(世道)가 순환(循環)해서 공의(公議)가 마침내 펴져 그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과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추중을 당했던 분들의 명성을 끝내 민멸되게 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조금이나마 후인의 한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 대왕께서 하사하신 관영(冠纓)은 지금 이하종(李河宗)의 집에 소장되어 있고, 어찰(御札)은 송 판서(宋判書)의 아우
송상인(宋象仁)이 판서 집에서 얻었다가 인조조(仁祖朝)에 올리니, 임금이 기뻐하고 송상인의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문건 [李文楗]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