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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면 광진리 위정사(長延面 廣陳里 威靖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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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면 광진리 위정사(長延面 廣陳里 威靖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6. 13. 06:47

 

장연면 광진리 광석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연산인 김정경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위정사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 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김정경(金定卿)은 본관 안산. 시호 위정(威靖). 1396년(태조 5) 예빈시판사(禮賓寺判事)로 전라도 ·충청도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의 점검과 병선(兵船)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난인  방간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410년 다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를 거쳐 이조전서(吏曹典書)가 되었다.


 

 

위정사(威靖祠)는 숙종 8년(1667)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옆에는 사당을 관리하며 문중일이 있을때 사용할수 있도록 살림집이 한채 자리하고 있다.

 

 

위정사 사당앞에는 1980년에 세운 김정경의 신도비가 있다. 또 하나의 신도비는 광석마을 입구 좌측 마을회관옆네 자리하고 있다.

사당 앞마당에는 출처를 알수 없는 암석이 몇기 자리하고 있다.

 

 

 

 

공은 휘(諱)가 정경(定卿)이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위(金渭),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원상(金元祥),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성경(金星慶)이 바로 그 증조, 조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밀직 부사(密直副使) 조천기(趙千基)의 딸인데,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을유년(乙酉年, 1345년 충목왕 원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우리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삼군 절제사(三軍節制使), 이조 전서(吏曹典書)를 지내면서 군정(軍政)에 참여했고 전선(銓選)을 관장하여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두 번이나 중국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수고로움이 갖추 지극했고, 박포(朴苞)의 난을 만나 힘을 합쳐서 난리를 평정하여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져 품계는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다.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기해년(己亥年, 1419년 세종 원년)에 병이 들어 누웠을 적에 임금은 의관(醫官)을 줄곧 보내 진찰케 하여 약물(藥物)을 내렸고 내시(內侍)를 보내 문안케 하였으며, 공이 일찍이 노루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사냥을 특별히 명하여 하사하였었는데, 이해 10월 15일에 졸(卒)하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몹시 애통해 하여 조정의 업무를 멈추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위정(威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애도하고 영화롭게 한 은전(恩典)을 전례보다 더하여 예를 갖추어 광주(廣州) 현주리(玄州里)에 장사지내었다.

공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미더웠으며 절약하고 검소하였다. 평소에 육도 삼략(六韜三略)을 자부하여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즐겨 보았고 언제나 남용(南容, 공자의 제자)의 백규(白圭)에 관한 말2)을 외었으며,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는데, 판서(判書) 신익(申翼), 신양군(新陽君) 노영(盧英),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딸로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別將) 김지(金沚)는 신씨(申氏)가 낳았고, 호군(護軍) 김관(金灌), 별장(別將) 김척(金滌)은 노씨(盧氏)가 낳았으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평호공(平胡公) 김개(金漑), 안성위(安城尉) 김한(金澣), 서령(署令) 안철산(安鐵山)의 아내는 왕씨(王氏)가 낳았다. 후손은 많아서 다 등재할 수 없고 그 가운데 기록할 만한 자는 평호공의 아들 교감(校勘) 김맹강(金孟鋼)이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며, 손자 김곤(金琨), 김위(金瑋), 김필
(金珌)과 6대손 김취의(金就義), 7대손 김항(金沆)이 잇달아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김필(金珌)은 가장 이름이 알려졌으며 사적(事蹟)은 기묘록(己卯錄, 중종 14년(1519) 기묘 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된 명현(名賢)을 기록한 책)에 나온다. 6대손 김취려(金就礪)는 학문으로 일컬어졌고, 8대손 김석명(金錫命)은 무예로 알려졌다.

외손으로 드러난 자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이노(李輅), 영의정(領議政) 이시백(李時白), 판서(判書) 이시방(李時昉),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조창원(趙昌遠), 판서(判書) 조계원(趙啓遠), 의춘군(宜春君) 남이흥(南以興), 판서(判書) 최내길(崔來吉), 영의정(領議政) 최명길(崔鳴吉),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 판서(判書) 박장원(朴長遠),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 판서(判書) 이사명(李師命),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다.

공이 죽은 지 이미 3백여 년이나 되어 묘비에 새긴 글자가 닳아서 없어졌으므로, 지금 김필(金珌)의 6대손 정랑(正郞)
김정오(金定五)와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이 다시 비석을 세울 것을 도모하여 나 이의현(李宜顯)에게 묘비의 글을 가지고 와서 그 뒤에다 추기(追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체로 나 이의현의 8대조 상상공(上庠公, 이종형)은 실로 교감공(校勘公, 김맹강)의 사위가 되시는데, 예전 선고(先考) 의정공(議政公, 이세백(李世白))이 나온 뿌리를 미루어 족보를 만들 적에 언제나 공의 행적이 가려져 아직 드러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선고의 뜻을 생각하면 도리에 사양할 수 없는 바가 있어 삼가 가승(家乘)에 근거하여 대강 개략(槪略)을 위와 같이 기술한다.

각주

  • 1) 박포(朴苞)의 난 : 박포는 조선 시대 문신.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의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상작이 높지 않음을 불만하다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는데, 당시 태조의 4남 방간(芳幹)과 5남 방원(芳遠)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반목이 심해지자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이산(尼山)에 장류(杖流)되었다가 참수되었음. 제2차 왕자의 난이라고도 함.
  • 2) 백규(白圭)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편(抑篇)의 시구(詩句)로, ‘흰 구슬의 티는 그래도 갈아내면 되겠지만, 이 말의 결점은 어떻게 할 수도 없다.[白圭之玷商可磨也 斯言之玷不可爲也]’고 한 것을 남용(南容)이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하여 외었다는 고사(故事).

    김정경 [金定卿]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