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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면 삼방리 광주이씨묘역(佛頂面 三訪里 廣州李氏墓域) 본문
충청북도 기념물 제152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탑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조선중기 사림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탄수 이연경 선생의 묘소를 중심으로 선생의 조부인 이세좌, 부친인 이수원, 아들 이호약, 손자 이광악장군의 묘소가 위아래 5대에 걸친 묘역 조성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또한 여러 가지 석물들이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문인석 조각 수법의 변화상을 한 곳에서 엿보고 학습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연경(1484∼1548)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이다.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세좌(李世佐)의 손자이며, 도사 이수원(李守元)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18년 방환(放還)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하여 ‘원사인자손(寃死人子孫)’으로 천거되었다. 평소 조광조와 교유로 인하여,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귀양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선생은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그의 문하가 되었다. 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 등이 선생에게서 배운 제자들이다.
선생의 손자인 이광악(李光岳)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에서 좌익장(左翼將)으로 김시민 장군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왜적을 격퇴시켰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교리(校理) 이공(李公)은 광주(廣州) 사람인데, 휘(諱)는 연경(延慶)이고, 자(字)는 장길(長吉)이다. 그의 시조 이집(李集)은 고려 말엽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지조가 있어 신돈(辛旽)이 원수처럼 미워한 바람에 영해(嶺海)로 피난을 갔다가 신돈이 주살되자 나와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의 벼슬을 하였다. 고조 이인손(李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내고 충희(忠僖)의 시호를 받았으며, 증조 이극감(李克堪)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으며,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는 갑과(甲科)에 합격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이수원(李守元)은 충청 도사(忠淸都事)를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남양 방씨(南陽房氏)는 사용(司勇) 방의문(房毅文)의 딸인데, 방현령(房玄齡,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상(名相))의 후손이 동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성화(成化) 갑진년(甲辰年, 1484년 성종 15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의표(儀表)가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줄로 알았다. 홍치(弘治) 계해년(癸亥年, 1503년 연산군 9년)에 광양공이 뜻하지 않은 참소를 당하여 북변으로 유배되고 여러 아들들도 모두 뿔뿔이 나뉘어 귀양 가게 되자, 공이 홀로 할아버지를 수행하여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으나 굳건히 가다듬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광양군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그 이듬해 방면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영외(嶺外)로 유배되자 공이 또 수행하다가 중도에서 공도 해도(海島)로 유배됨을 당하였다. 그때 연산주(燕山主)의 혼미한 학정이 특히 심해져 의관(衣冠)들을 거의 다 주살하였는데, 광양공으로부터 여러 숙부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화를 당하였다. 공이 통분한 나머지 나무처럼 말라버렸는데, 급보가 북쪽에서 이르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대뜸 단정하고 정결히 해놓고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 허둥대며 평상시의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비로소 방면되어 돌아와 임시로 충주(忠州)에서 살았는데, 할아버지 외의 여러 상사(喪事)를 3년이 지나도록 장사지내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그냥 소복(素服) 차림으로 고심하고 힘을 다한 끝에 장례를 모두 다 치렀다. 정묘년(丁卯年, 1507년 중종 2년)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자 억울하게 죽은 자손이라고 하여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직책을 한결같이 예법에 따라 수행하니, 그때 선릉에 하나의 법사(法司)가 있다고 일컬었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떠나 더욱더 뜻을 가다듬고 글을 읽었다. 조광조(趙光祖)공 같은 일시의 명류(名流)들과 같이 친밀한 벗으로 지내면서 도의(道義)를 강마하고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다. 갑술년(甲戌年, 1514년 중종 9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비로소 충주에다 살 곳을 정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에 사지(司紙)에 도(道) 있는 이로 천거되어 임명되었다가 형조ㆍ공조의 좌랑(佐郞)으로 전직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 봄에 추천의 과거에 합격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ㆍ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 전직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적에는 정직 공평하고 성실하게 하였으며, 강관(講官)이 되어서는 정성으로 임금의 뜻을 감동시키고자 힘썼고 오로지 장구(章句)의 설만 고집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야대(夜對)에 동료가 아뢰기를, “지금 태평 시대를 조성하려고 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당대 제일의 사람을 영상으로 발탁해야 합니다.”고 하니,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는 조광조를 이른 것입니다. 조광조는 정말로 어집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을 씀에 있어 모름지기 경력이 많고 인망이 흡족한 다음에야 큰 임무를 위임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는데, 조광조가 그 말을 듣고 달려가 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사례하였다.
이때에 중종이 바야흐로 선왕(先王)의 정치를 회복할 뜻을 가지고 있다가 조광조를 얻어 위임하고 성공을 책임 지웠다. 조광조가 임금을 만난 것에 감격하여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힘과 마음을 합하여 위로 보필하고 아래로 가르쳐서 거의 접근하였는 데다가, 공이 좋은 방안을 개진하고 훈계를 말하는 등 이처럼 충직하고 간곡하였으므로, 여론이 흡족하여 지극한 치세를 기대할 수 있다고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이미 동류끼리 상종하는 것을 면치 못한 데다가, 탁한 사람을 몰아내고 맑은 사람을 등용할 적에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않은 옛날 신하들이 크게 분개하였다.
이해 가을에 양사(兩司)에서 공로도 없이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기록된 자를 삭탈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심정(沈貞)ㆍ남곤(南袞)ㆍ홍경주(洪景舟) 등이 밤에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조광조가 그의 당류들과 같이 사직을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고변한 다음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놓고 모두 다 유배한 다음 뒤따라 주살하였다. 이어서 남곤이 유배를 보낼 사람의 성명을 기록하여 올렸는데, 공의 이름이 첫머리에 써있었다. 중종이 붓으로 공의 이름을 지우면서 말하기를, “이연경은 내가 그 위인을 알고 있으니, 귀양을 보내지 말고 해직만 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향리로 돌아갔다. 그 뒤에 산수의 사이에서 고기를 낚고 즐기며 담담하게 살았다.
가정(嘉靖) 무신년(戊申年, 1548년 명종 3년) 겨울에 이르러 우연히 병환이 났는데, 12월 9일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나 충주 남쪽 불정(佛頂) 계좌 정향(癸坐丁向) 선영의 아래에 묻혔다.
공은 자품이 고매하고 학문이 심오하며 식견이 뛰어났으므로 기거와 동작이 저절로 법도에 들어맞았다. 부모를 봉양할 때 반드시 정성껏 하였고 문안을 드릴 때 반드시 근신하였으며, 상중에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다하였다. 인륜(人倫)에 독실하였고 마음을 미루어 급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여러 아우들과 우애가 있어 즐겁게 지내면서 회유(誨諭)하는 등 주야가 다하도록 싫증을 내지 않았다. 안색이 온화하고 언어가 따뜻하며 흉금이 시원스러웠으므로 사람들이 즐겁게 따랐는데, 사람의 오염된 마음과 사특한 생각으로 하여금 저절로 깨끗이 정화되도록 하였다. 그 학문은 속루(俗陋)를 벗어나 고명(高明)한 곳에 마음을 기울이고 사서(四書)를 도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는 모름지기 먼저 잡된 티끌을 제거하여 심지(心地)로 하여금 청명하게 해야만 도에 들어가는 길을 얻을 수 있어 소인이나 금수의 영역으로 가는 것을 면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물론 지식과 행실이 서로 필요하지만, 지식에 먼저 힘써야 한다. 그런데 지식을 함양하려면 또 마음을 맑게 가져 욕심이 적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상(志尙)이 높고 학식이 원대하였기 때문에 무너지는 파도 속에 탁월하게 자립하여 시종 변하지 않아 기묘 완인(己卯完人)이 된 것이다. 공의 덕의가 드러나자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사모하였는데, 선비 중에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선인(善人)이 되고 향방을 알게 된 사람이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추천을 통하여 사람을 취택한 것은 명분이 바르고 뜻이 아름다웠으나 그때 간사한 사람이 너무나 무함하여 논파(論罷)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에 인종(仁宗)이 명하여 관작을 회복하였으나 정인(正人)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명종이 어릴 때를 틈타 곧바로 다시 무함하여 취소시켰다가 금상(今上)이 즉위한 그 이듬해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인종의 명을 거듭 밝힘으로써 공의 관작이 처음처럼 회복되었다. 아! 하나의 과거를 두 번 취소하고 두 번 회복하였지만 우리 공에게는 무슨 가감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평론한 자들이 이것으로 세도(世道)의 상승과 하강을 점치고 있으니, 오늘날 선류(善類)들이 서로 경하하는 것 또한 우리 공이 제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먼저 이성수(伊城守) 이지(李墀)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었고, 뒤에 의령 현감(宜寧縣監) 이연원(李延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일찍 죽고 큰딸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노수신(盧守愼)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심건(沈鍵)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생원(生員) 강유선(康惟善)에게 시집갔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공에게 글을 배워 저명한 사람이 되었다. 아우의 아들 청양 현감(靑陽縣監) 이호약(李好約)을 후사로 삼았다. 관찰사는 후사가 없다. 정자는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심희수(沈喜壽)는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노극신(盧克愼)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 아들 심창수(沈昌壽)는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윤지서(尹之瑞)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생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복성(康復誠)이고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용중(李用中)에게 시집갔다. 현감은 참봉(參奉) 김구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이광악(李光嶽)이고 둘째 아들은 이사악(李士嶽)이며, 큰딸은 감역(監役) 노대해(盧大海)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드러난 큰 성씨는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로다. 대대로 공경(公卿)이 나오니 덕이 찬란하고 영기가 빛났도다. 훌륭한 자손이 태어나니 가문의 명성을 계승하였도다. 망극한 세상을 만나니 온 가문이 화를 당하였도다. 만 번의 죽음을 겪다가 살아나니 하늘의 해가 다시금 밝아졌도다. 이에 총애의 녹봉을 받으니 사관(祠官)으로 별을 보고 출사했도다. 이윽고 떠나 학문을 하니 벗을 택하여 경전을 연구하였도다. 학문이 수시로 진취되고 그릇은 늦게 이루어졌도다. 모친을 모시고 돌아가 은거하니 눈 속에서 낚시질하고 구름 속에서 밭을 갈았도다. 위에 성군이 있으니 현인들이 떼를 지어 나갔도다. 용이 하늘에서 나니 학이 그늘에서 울며 화답하도다. 벼슬이 열수(列宿)와 응하니 공조에서 형조를 역임했도다. 거듭 천과(薦科)에서 발탁해주니 치의(緇衣)의 성의를 보였도다.1) 해치관(獬豸冠, 사헌부 지평을 지칭함)을 드높이 썼고 봉영(蓬瀛, 홍문관을 지칭함)에서 차분하게 걸었도다. 경연관으로 논사(論思)를 기운차게 드날리며 나의 충성을 다하였도다. 동지들과 더불어 태평의 치세를 만들려고 하였도다. 뜻하지 않게 소인배들이 마음속의 칼날에 독을 칠하고 있었도다. 충신을 역적이라 지적하니 모두 다 우레 속에 쓰러졌도다. 공만 임금의 기억에 힘입으니 불 속에서 옥이 벗어났도다. 옛날에 살던 곳으로 돌아오니 문전에 참새그물을 칠 정도였도다. 좌우에 도서(圖書)를 비치하고 전후에 계명(戒銘)을 써놓았도다. 풍월(風月)은 임금의 은혜이고 강호(江湖)에는 의리의 영광이로다. 우환 가운데 낙이 있으니 그 낙을 견줄 것이 없었도다. 오고간 것 모두 얽매이지 않았으니 번복이 저절로 바뀌었도다. 사슴을 얻어도 기뻐할 것이 없고 말을 잃어도 놀랄 것이 없도다. 아름다운 난초가 골짜기에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향기가 났도다. 기풍을 들어본 사람은 수립되고 의리를 본 사람은 곧아졌도다. 내가 그 이유를 찾아보니 욕심이 적고 마음이 깨끗했도다. 이러한 사람의 선행을 어떻게 인멸되게 할 수 있겠는가? 비석에 새기어 후세에 보이니 천고토록 우뚝 서 있을 것이로다.
각주
- 1) 치의는 고대에 사용한 조복인데,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성의를 보였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이 좋아하기를 치의(緇衣)처럼 하고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항백(巷伯)처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에 “치의와 항백은 모두 ≪시경(詩經)≫의 편명이다. 여기서 치의를 입은 자는 어진 이이다.”고 하였음.
이연경 [李延慶]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원본글 출처 | 이연경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 이황(李滉) | 이명 | 자 : 장길(長吉)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9 유학(儒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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