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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석화리 유래비(北二面 石花里 由來碑) 본문
북이면 석화리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석화리 유래비이다.
석화리는 면의 남쪽에 위치하며 동은 선암리 서는 서당리 남은 내수읍 세교리, 북은 영하리에 접해있다.소반봉 남쪽에 발달한 마을로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 지역이다.석화리는 마을의 앞쪽만이 남쪽으로 트이고 뒤의 양옆은 산이있다.마을 이름은 물이도는 곳(回串이라는 뜻으로 돌꼬지(石花)가 되였다.1914년 국대리 소롱리 대길리의 각일부와 산외삼면의 일부를 병합하고 석화리라 칭하고 북이면에 편입하였다.자연마을로는 돌꼬지가 있다.청원군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약 470년의 은행나무가 있다. 경주이씨의 세거지이다.
돌꼬치는 석화리의 옛 명칭이다.
낭자곡의 북쪽 지역을 경계로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고 있던 시절, 그러니까 고구려로서는 장수왕, 백제로서는 문주왕이 통치하던 470년 경, 오랜 세월 밀고 당기던 국경쟁탈전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양국 모두 평화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재연될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백제의 ‘가는다리’와 고구려의 ‘자근작골’ 사이의 영토가 아직도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강한 자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로들 만만치 않은 적수들이어서 무력의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면 모처럼 이룩된 평화가 깨지는 것은 물론 양측 모두에 막대한 희생자가 날 것은 뻔한 일이었다.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을 방위하던 장수들은 다행히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고 협상으로써 영토분쟁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양쪽 고을의 중간지점에서 여러 번 만나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아주 오래 전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분쟁이 막 시작되고 있을 무렵,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자치적인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던 이 지역의 촌장들은 머지않아 전쟁의 참화에 휩쓸릴 부락의 앞날을 예견했다. 그래서 양국의 어느 한 쪽으로 미리 편입되는것이 재앙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촌장들은 부락민 전체의 의견을 물어 편입될 나라를 결정하고 그 결정사항을 어딘가 표시해 두었다. 그러나 편입의 절차를 밟기도 전에 전쟁이 터져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관련자 전원은 죽어 버렸다. 그 후 사람에 따라서 당시 편입되기로 결정을 본 국가가 고구려라기도 하고, 백제라기도 하며 지금까지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양쪽 태수들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 결정된 국가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국경마을의 여러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거의 백여 년 전 그 때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수소문하였다. 마침내 백제 측에서는 당인이라는 사람을, 고구려 측에서는 기미기라는 사람을 찾아내었다. 둘 다 구십이 훨씬 넘은 백발의 노인들이었다. 그들의 증언은 거의 일치했는데 즉, 태어나기 전의 일이어서 확실한 것은 모르나 철들 무렵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촌장들이 당시의 결정을 훗날에라도 증명하기 위하여 꽃무늬가 들어있는 석판에 나라의 이름을 새긴 뒤 부락의 어느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양국 태수들은 군사들을 시켜 분쟁지역의 모든 우물들을 뒤지게 했다. 메워져 흔적만 남은 곳이라도 모두 파보게 했다. 마침내 ‘가는다리’와 ‘자근작골’의 중간 지점에 있는 옛 우물에서 석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글씨로 ‘백제동(百濟洞)’ 즉, 백제의 마을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글씨의 주변에는 백제 특유의 연화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고구려 태수는 당초의 약속대로 백제에게 땅을 내주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옛 선인의 지혜와 통찰력이 또 하나의 무익한 전쟁을 막은 것이다.‘돌꼬치’란 돌에 새긴 꽃, 혹은 돌로 만든 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원군 북이면 전승, 청원군 전설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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