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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청용리 김질간묘소(靑安面 靑龍里 金質幹墓所) 본문
청안면 청용3리 회룡곡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조 김질간의 묘소입니다.묘소는 청용리를 접어들며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소에는 문인석 2점과 망주석 그리고 동자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동자석은 근간에 도굴범등에 의하여 반출되였으며 지금은 새로 제작된 동자석을 세워 놓았습니다.그래서 그런지 동네분들이 외지인을 많이 경계하는 눈치였습니다. 묘지옆에는 비석이 서있으며 비석은 표면이 많이 박리되여 있는 상태입니다.
김질간(金質幹)의 생몰년은 1564(명종 19)∼1621(광해군 13) 입니다.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매(雙梅), 본관은 광산(光山)입니다. 할아버지는 공조정랑을 지낸 김광우(金光佑)이며, 아버지는 성균관 박사를 지낸 김응구(金應龜)이고, 어머니는 노경기(盧景麒)의 딸 교하노씨(交河盧氏)입니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602년 병조좌랑이 되고 1605년부터 외직으로 나가 제원찰방(濟原察訪)·대동찰방(大同察訪)·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전라도도사·창원판관·강진현감(康津縣監) 등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이듬해 『선조실록』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었다가 곧 사간원 헌납을 거쳐 1612년 병조정랑에 승진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장령·사간원 사간등을 지내면서 대북정권(大北政權)의 정책 추진을 주도하였다. 1613년(광해군 6) 겸보덕이 되었으며 1614년 사헌부집의로 홍문록을 초록(抄錄)하였고, 1615년 홍문관 교리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 충청감사와 강원감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못하였다.
조선조 선조 때 대북의 지도자였던 김질간(金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 "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김진우(金震羽), 호남 8문장의 한 사람인 김공선(金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618년 여러 차례 승지에 오르고 판결사를 지내다가, 1620년에는 승정원좌승지,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영정(影幀)을 영변(寧邊)에서 봉안하여 온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청안면 청룡리에 있다.김질간의 묘지석은 표면이 많이 박리되여 있습니다.【참고문헌】 『광해군일기』 『괴산군지』 『괴산군 신도비·묘갈 번역집(2002)』
김질간의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매(雙梅)5)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명종 19년(1564)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승훈랑(承訓郞)으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낸 김응구(金應龜)이다. 『만력십육년무자이월이십사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에 의하면, 선조 21년(1588) 식년시 진사에 3등 89인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선조 34년(1601)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됐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1612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이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집의(執義), 교리(校理) 등 삼사(三司)의중요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1613년 겸보덕(兼輔德), 1616년에는 보덕(輔德)이 됐다. 직강(直講)으로 있으면서『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기주관으로 참여했다. 선조의 옥책(玉冊)을 올릴 때 참여한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에올랐으며, 1618년 여러번 승지(承旨)에 오르고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1621년 대사간(大司諫),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됐으나, 4월 16일 세상을 뜨니 향년 58세이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됐다.묘소는 괴산군 청안면 청용리 원회용동에 있다 [증평의 인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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