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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하노리 희암재(遠南面 下老里 希菴齋)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하노리 희암재(遠南面 下老里 希菴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5. 21. 11:13


희암재는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의 안가마골에 있는 무송윤씨의 재실이다.





희암재와 관련된 이물로 윤진을 들수있다. 본관은 무송(). 자는 계수(), 호는 희암()·송국주인(). 아버지는 현령 윤해()이다.

한성에서 출생하여 4세에 책을 읽고 글씨를 써서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칭하였다. 1554년(명종 9) 정산() 박형()의 문인이 되어 장차 대유()가 될 인물이라 하였다. 1580년 이조판서 윤국형()의 천거로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한 1584년 경기도관찰사가 효행으로 천거하여 헌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학행으로 제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인 경상북도 상주에서 군량미와 모병에 힘써 이듬해 조정에서 사섬시주부에 제수하였으며, 사도시주부, 장악원주부, 사헌부감찰,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595년 처가에 갔다가 임진왜란의 참상이 심한 것을 보고, 스스로 상주 지방 둔전관이 되어 농사에 힘쓰고, 구휼책 12조를 상주하자 조정에서 천여 석의 구황곡을 지원하였다. 이해 6월 단성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려 1600년에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정경세, 이준 등과 교유하였다.


김장생과 『삼진도()』를 저술하고, 상주 도남서원() 창건에 앞장섰으며, 수백 명의 사대부 자제를 독음포(禿)에서 교육시켰다.


1965년 윤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희암재가 건립되었다.처음에는 묘소가 상주에 있었으나, 1940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가곡()으로 이장하였다.







원남면 하노리에 무송윤씨(茂松尹氏)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3백여 년 전이다. 당시 무송윤씨의 시조인 윤양비(尹良庇)의 14대손 윤청(尹暒)이 현종(顯宗) 때 경상북도 상주에서 살다가 원남면 하노리 능촌에 세거한 것이 처음이다. 희암재(希庵齋)는 1965년에 세운 것으로, 희암(希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윤진(尹瑱)[1541~1612]의 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벽체는 시멘트벽돌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동기와를 올렸다. 재실 주변은 돌담장을 둘렀는데, 솟을삼문에 ‘희암재(希庵齋)’라는 현판을 달았다.



무송윤씨는 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윤성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고려시대에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장(戶長)을 지낸 윤양비(尹良庇)이다. 윤양비의 증손 윤택(尹澤)은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윤택의 손자 윤소종(尹紹宗)은 조선시대에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시조 윤양비의 14세손이자 윤효관의 아들인 공조참의(工曹參議) 윤성이 경상도 상주에서 살다가 1660년(현종 1) 천연두를 피해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으로 가던 중 충청도 음성 당곡 주막에서 외숙부 반운익을 만나서 원남면 하노리 능촌에 정착하고 살았다.

윤성은 영조 때 손자 윤이항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자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밖에도 문신인 희암 윤진[1541~1612]이 유명하다. 이들 후손들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능모랭이마을에 모여 살았다.



희암재옆에 자리하고 있는 관리사이다.

벽돌조에 함석지붕을 이고 있으며 상주하는 사람은 없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윤성의 묘와 윤진의 재실인 희암재(希庵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