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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화곡리 경모재(周德邑 花谷里 敬慕齋) 본문
이곳은 함종어씨 14세이신 사과공 맹종의 재실이다. 공의 13대조이신 시조 휘 화인공께서 고려명종(明宗) 원년(1171) 宋에서 난을 피하여 강원도강릉에 시거하시다가 평남 강서군 함종면으로 옮겨 착하였으므로 본관을 함종으로 하였다.
조선 세조(世祖) 14년(1468) 적개공신봉아성군자헌대부호조판서겸 세자좌빈객(敵愾功臣封牙城君資憲大夫戶曹判書兼世子左賓客)을 역임하신 양숙공 세공
(襄肅公 世恭)의 5명 자제 중 다섯째 분으로 500여년 전 낙향하여 황금곡에 시거(始居)한 후 후손들이 번창하여 석명공파(碩明公派), 덕련파(德蓮派), 석원파(石院派) 등으로 나뉘어졌으며 이곳 경모재는 전국의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2005년도에 신축하였다.
2006년 11월19일 함종어씨사과공파종중에서 경모재를 신축하며 남김 머릿돌을 참조하였다.
함종어씨의 유래와 입향조는 다음과 같다.
시조(始祖)는 화인(化仁)이며 중시조(中始祖)는 어세공(어세공;1432~1486/세종 14~성종 17)으로 화인의 12대손이 된다. 어세공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경(子敬)이며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박사를 거쳐 봉상시녹사, 한성부참군, 승문원부교리, 공조좌랑, 성균사예,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성부판윤, 경기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이어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친 뒤 1484년(성종 15)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경학과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세조의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를 증보하여 올렸고1464년(세조 10)에는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임금 앞에서 강론하였다.시호은 양숙공(襄肅公)이다.
입향조(入鄕祖)는 어맹종(魚孟淙,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으로 시조 화인의 13대손이며 입향시기는 15세기 말로 보아지며 입향지는 주덕읍 사락리 황금곡(黃金谷)이다.함종 어씨의 입향경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계유보(癸酉譜, 1998) 상권 37쪽에 있는 묘표를 보면 “맹종(孟從) 사과(司果) 일본작참봉(一本作參奉) 十一月八日卒 증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贈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 始居忠州 墓在忠州德面黃金谷方伊山 中 里 戊坐原 配淑人 宜寧南氏 父舜孫 조진사효공(祖進士孝恭) 증조생원전(曾祖生員恮) 外祖太宗王子敬寧君 裶四月十五日卒 墓雙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연월과 덕행사적(德行事績)이 소상하게 기록된 묘갈(墓碣)이 있었다고 하는데 훼손되어 없어지고 가승(家乘)도 불타 없어져 선대의 덕행을 참고하고 징험할 곳이 없어 공의 9대손 諱 석현(錫玄)이 1818년 3월 墓表를 지으셨다고 하였는데 지금 공의 묘소 앞에 있는 표석이다. 이 묘표에 공의 부친께서 “우리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등과(登科)하여 작위가 이미 극에 이르렀으며 세세토록 경사스럼과 다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너희들은 과거 공부를 않는 것이 좋겠도다” 하심에 공께서는 그런 가훈을 이어받아 벼슬살이에 뜻이 없어 충주 땅에 처음으로 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께서 충주에 시거하게된 연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연산군 즉위 후 왕의 폭정과 훈구대신들과 사림신진관료들의 대립에서 생긴 무오사화(1498년/연
산군 4)와 갑자사화(1504년) 등 사림학자들의 계속된 피화(被禍) 속에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한 뜻있는 선비들은 벼슬길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은거(隱居)가 성행했으리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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