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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읍 용산리 충룡사(陰城邑 龍山里 忠龍祠) 본문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있는 조선 말기 순국 열사 박세화를 기리는 사당.
본관이 밀양인 박세화(朴世和)[1834~1910]는 1895년(고종 32)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분개하여 도사 윤응선(尹膺善)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었다. 그후 석방되어 음성읍 동음리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찾아오는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망국의 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團章)이 추서되었다. 충룡사는 1964년에 당시의 음성군수 유용기가 지방 유림들의 협조를 얻어서 건립한 사당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토석혼축의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충룡사 담장 옆에는 박세화 순도비가 세워져 있다.
충룡사에는 음성 유림 주최로 매년 봄과 가을에 윤응선과 신현국(申鉉國), 정규해를 추가로 배향하여 향사하고 있다.
음성군에서는 2001년 12월 7일에 충룡사를 음성군 지정문화재 제2호로 지정하여 관리해오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박세화는 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묵재(黙齋) 박경상(朴景祥)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박기숙(朴紀淑)이다. 함경남도 고원군 남흥리에서 태어났다.
1860년(철종 11)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1870년(고종 7) 향리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포상을 진정하려 하자 부끄럽다며 진정서를 빼앗아 불살라 버리고 안변으로 이사하였다. 다시 충청도 청풍 장선리로 이사해 서당을 세워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882년(고종 19) 영능참봉을 지내다가 2년 뒤 사직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도사(都事) 윤응선과 함께 문경에서 창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지금의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학문에 전심하였다.
1910년(순종 4) 7월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도 망하고 도(道)도 망하였으니 장차 어찌할고?”라는 글로 결별 인사를 한 후 음식을 전폐하다가 단식 23일만에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창동에 있는 아버지 묘 아래에서 순절하였다.
영남에 있던 전우(田愚)와 성리학에 관해 많은 토론을 하였으며,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영향을 주었다.
유작으로 『의당집(毅堂集)』4책과 『육례홀기(六禮笏記)』1책이 있다.
원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새터에 있던 것을 1932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오리나무골로 이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추서받았고, 1964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충룡사가 세워져 배향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윤응선(尹膺善)은 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파평. 자는 군서(君瑞), 호는 회당(晦堂). 좌의정 윤사흔(尹士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윤교명(尹敎明)이다. 지금의 경기도 양근군 남시면 지탄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고령신씨로 신각모(申慤模)의 딸이다. 부인은 영월신씨로 신석하(辛錫河)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청풍의 산중으로 들어갔다. 과거에 합격하여 1889년(고종 26)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40세에 박세화(朴世和)의 문하생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스승 박세화의 의거를 돕다가 7개월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박세화와 함께 음성 동음리에서 후학 교육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향년 72세로 서거하였다.
저서로 『회당집(晦堂集)』이 있으며, 1909년에 지은 「운곡서원고유문」과, 최진(崔璡)·최규(崔珪)의 효행록에 붙인 「제최씨이효록(題崔氏二孝錄)」, 「마이산」·「백운산」 등의 시가 전한다. 묘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주론(舟論)에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충룡사(忠龍祠)에 박세화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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