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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면 하담리 하강서원(金加面 河潭里 河江書院)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금가면 하담리 하강서원(金加面 河潭里 河江書院)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7. 25. 16:14


하강서원은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풍산인 홍이상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이칭으로 하강단소(荷江壇所)라고도 합니다



홍이상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원례(元禮), 호는 모당(慕堂)이다. 1579년(선조 12) 식년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예조와 호조의 좌랑과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기랑(騎郞)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집의, 응교, 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예조참의로 왕을 서경(西京)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한때 소론의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파천되었고, 이어 청주목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대사간에 소명(召命)되었고, 도헌(都憲), 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다. 하강서원은 풍산홍씨 문중에서 건립하고 봉사하고 있으며, 홍이상 1인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기에 사우(祠宇)라 할 수 있다.



충주시 금가면 지방도 520호선의 강수로와 김생로가 나뉘는 삼거리(공군부대 교육훈련중대 후문)에서 나지막한 동산이 있는 강변 쪽으로 농로를 따라 약 300m 정도가면 남한강이 흐르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홍이상(洪履詳)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인상(麟詳), 자는 원례(元禮)·군서(君瑞), 호는 모당(慕堂). 아버지는 사직 홍수(洪修)이며, 어머니는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홍이상은 민순(閔純)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9년(선조 12)에는 식년 문과에 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예조·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수찬(修撰)·지제교·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고 호당(湖當)에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뒤이어 집의(執義)·응교를 거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었으며 사간·사인을 지내고 황해도안무사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에는 직제학·동부승지·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 어가를 호위하여 서경에 이를 즈음 부제학이 되었으며 성천에 도착함과 더불어 병조참의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는 정주에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좌승지에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에는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의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올린 성혼(成渾)을 배척하는 상소를 반박하고 성혼을 두둔하다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1607년(선조 40)에는 청주목사, 1609년(광해군 1)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일파에 몰려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좌천되었고 병들어 사직한 후 고향에 돌아와 물가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전한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성석동 성동 고봉산 기슭에 남향(南向)하여 위치하고 있다. 배(配) 증(贈)정경부인 안동김씨의 봉분과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각 15m이고 높이는 240㎝이다. 묘 앞에는 묘비(墓碑), 상석(床石),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이준이 찬한 묘비(墓碑)가 있으며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하나 이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전을 하였다.


1793년(정조 17)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조(不祧)를 명하여 하강사(荷江祠)를 세워 향사(享祀)하고 있다. 부조묘와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성석동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의 하강서원(荷江書院)에서도 향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강가의 봉우리에는 규모가 웅장하고 단청도 화려한 모현정(慕賢亭)이 있다. 후학 유생들이 홍이상의 덕을 사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묘소(墓所)에서 약 150m 아래 지점에는 1630년(인조 8)에 건립된 이정구(李廷龜)가 쓴 신도비가 있다.







하강서원은 1786년(정조 10) 5월 창건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07년(고종 44) 유허지에 하강단소(荷江壇所)라고 설치하여 봉단(奉壇)하다 1974년 5월 옛 모습대로 서원을 중건, 복원하였다. 1991년 7월 서원 내의 강당과 모현정 중수에 착공하여 12월 완공을 하였다.



하강서원은 가공된 장대석으로 축조한 기단 위에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의 5량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획하면서 반 칸의 전퇴를 두었고, 전면 각 칸에는 모두 4분합 띠살의 열개문을 달아 연목에 걸도록 하였다. 위패를 봉안한 제각은 솟을삼문에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를 보이고 있다.




조선 선조 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학파 사람인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이자 뛰어난 강관(講官)이었던 홍이상을 모신 서원이자 사당인 하강서원은 충절과 예향의 고장인 충주시의 대표적 문화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






서원 부지는 약 300평 정도로 앞쪽에 주차장이 있고 서원 강당과 제각이 위치하며 서원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동산에 모현정(慕賢亭)을 세웠다. 「모현정기(慕賢亭記)」는 청하공 홍옥보의 5세손인 홍우기(洪祐夔)가 썼다. 강당이 위치한 담 쪽에는 운산풍산홍공승기기적비(雲山豊山洪公承箕奇蹟碑)가 세워져 있다.



홍승기(洪承箕)는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유생이자 행정가이다.


홍승기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제11대 괴산군수를 지냈으며, 충주향교 전교를 지냈다. 1969년 유도회 충주지부를 창설하고, 1971년 유도회 충주지부장에 취임하였다. 충청북도향교재단 이사장, 중앙유도회총본부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하강서원을 중수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1984년 홍승기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하강서원 앞에 운산풍산홍공승기기적비(雲山豊山洪公承箕奇蹟碑)를 세웠다.



풍산홍씨는 홍지경을 시조로 하고 홍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이다.

풍산홍씨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한다. 홍지경은 1242년(고종 2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국학직학을 역임한 인물로 풍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풍산홍씨는 고려시대 홍유(洪有) 등 대제학 4명을 배출했고,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28명, 무과 급제자 4명, 왕비 1명, 재상 4명, 공신 1명, 청백리 7명을 배출했다.

충주에 입향한 풍산홍씨는 수운판관을 지낸 홍박(洪溥), 남원부사를 지낸 홍탁(洪濯), 이천부사를 지낸 홍만운(洪萬運),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만수(洪萬遂), 승문원저작을 지낸 홍만통(洪萬通), 의정부사인을 지낸 홍만우(洪萬遇), 전라감사를 지낸 홍주삼(洪柱三), 예산현감을 지낸 홍주문(洪柱文), 사간원헌납을 지낸 홍주진(洪柱震) 등을 배출했다.


문경공 홍이상(洪履祥)의 6형제 중 셋째 아들 홍집, 다섯째 아들 홍박(洪溥), 여섯째 아들 홍탁(洪濯) 삼형제가 1600년대 초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 후 홍이상(洪履祥)의 둘째 아들 홍입(洪雴)의 4세손으로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중현(洪重鉉)이 1700년 초에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통
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주시에 거주하는 풍산홍씨는 2000년을 기준으로 178가구, 496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현재 세거지 별 분포를 보면 노은면 수룡리에 13가구, 금가면 잠병리와 월상리에 10여 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홍이상을 배향한 하강서원과 홍이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모현정(慕賢亭)이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있고, 홍만종 묘와 홍중하 묘가 충주시 금가면 도촌리에 있다.






하담리(河潭里)는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에 속하는 법정리이다. 

하소(강 하구의 늪)가 있었으므로 하소 또는 하담이라 하였다.


본래 충주군 가차면(加次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담리(斗潭里)·상잠리(上岑里)·사랑동(沙浪洞)·사천리(沙川里)의 각 일부 지역이 통합되어 하담리로 개편되었다. 1996년 면소재지를 공군비행장의 소음의 피해 때문에 도촌리로 이전하면서 행정리동 두담은 없어지고 하소만 존재한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중원군에 속하게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중원군이 충주시와 통합되면서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가 되었다.


하담리에는 장태산[132.9m]과 사휴봉[85.2m] 등의 낮은 산이 있고, 뒷산은 81.4m로 두담마을 안말 서쪽 강가에 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대전천(大田川)을 중심으로 들이 형성되어 있다. 하소에 있는 하소나루터는 하소에서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로 건너던 나루였는데, 주로 하소 주민들이 저우내들 벌터구니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두무소고개는 두무소마을에서 엄정면 목계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엄정면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2008년 3월 현재 면적은 2.27㎢이며, 총 21세대에 49명(남자 22, 여자 27)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경지 면적은 0.16㎢로 밭이 0.08㎢, 논이 0.08㎢, 임야 0.57㎢ 등으로 되어 있다. 현재 공군 비행장의 소음으로 인가는 대부분 외부로 이전하고 논밭에서 농사만을 짓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벼를 주로 재배하고 쌀·콩·고추 등이 생산되고 있다.

금가면사무소, 금가지서, 금가초등학교가 있었으나, 공군부대 건설로 인해 도촌리로 이전되었다. 오미·씨름터·새마을·건너매새·작은하수·씨름터거리·새마을·웃말·아랫말 등의 자연마을이 있거나 있었다. 행정리동으로는 하소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하강서원, 하강단소와 모현정이 남한강 옆에 있어 절묘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