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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강청리 곽은묘갈(伊院面 江淸里 郭垠 墓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강청리 곽은묘갈(伊院面 江淸里 郭垠 墓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22. 14:35





곽은의 묘갈은 송시열이 썼으며 국조인믈고 권23명류(名流)에 있다.

곽은 재실에서 보이는 앞동산에 자연석을 대좌 삼아 비석이 있으며 곽은의 묘지는 묘갈 5-6미터 옆에 아내인 평산신씨의 무덥과 같이 있다.



곽씨()가 옥천()에 살면서 대족()이 되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고려의 삼사 좌윤() 곽수원()에게서 시작하였다. 그의 묘()는 옥천 적등강() 가의 기곡리()에 있는데, 세 아들은 곽순(), 곽규(), 생원() 곽기()이다. 공은 생원의 아들로 휘()는 은()이고, 자()는 안부()이며, 성화() 8년인 임진년(, 1472년 성종 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과 장령()이 되었다. 그 가승()에 이르기를, “특명()으로 집의()를 경유하여 외직()으로 나가 담양 부사(使)가 되었는데, 치적이 최상()을 차지하여 승정원 승지()로 승진하였지만 미처 부임하지 못하였다.”하였으며, 또 ≪여지승람(輿)≫을 살펴보니, “부역을 경감해 주고 조세를 적게 해주자 고을 사람들이 존경하여 받들었는데, 갑자기 관()에서 졸()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통해 하며 술과 고기를 끊고 서로 조문하였으며,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일()에는 치제()한다.”하였고, 또 추강 선생() 남효온()의 기문()에, “곽후()가 자신을 근면하게 하면서 많지 않은 녹봉으로 일에 임하여서는 깨끗하게 잘 처리하였으며, 행정을 함에 있어서는 관대하고 대범하였으므로 아전들은 그의 위엄을 두렵게 여겼고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품게 되었으니, 공자()가 이른바, ‘적합한 인재를 얻으면 정교()는 시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에서 졸하여 장사지내러 돌아오는 날에 거리에는 곡()하는 소리가 서로 잇달았으며, 사민()들이 서로 논의하여 해마다 기일이 돌아오면 쌀을 모으고 재()를 마련하여 명복을 빈다.”하였으며, 가승()에 또 말하기를, “물고기 장사가 그 지경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담양의 백성들이 반드시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공의 증손녀서(婿) 오행민()이 늘 남쪽에서 노닐었는데, 상한() 몇 무리를 만났더니, 서로 말하기를, “내일은 바로 곽 아무개의 기일이다.”하였는데, 내일이란 바로 12월 17일이었으니, 그들이 더욱 오래될수록 잊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르기를, “공의 상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집물()을 모두 되돌려 주었는데, 유독 해진 상자 한 개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남아 있으므로 부인()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이 물건이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가? 빨리 되돌려 보내어 부자()의 청덕()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하였으니, 여기에서 집안을 바르게 다스린 한 단서를 볼 수 있다. 또 율곡 선생의 문집()을 상고컨대, 대사성() 신자승()은 바로 선생의 외증조()이니,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공은 그의 여서이며, 선생의 외조부[] 신명화()의 매부()이다. 묘()는 군()의 남쪽 동림산()에 있는데, 신씨()도 부장()하였다.




3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곽지한()으로 진사()이고, 다음은 곽지병()으로 만호()이며, 다음은 곽지정()으로 생원()이며, 손자인 정자() 곽시()는 문장()으로 세상에 명성을 날렸는데, 사자()들이 취하여 정식()으로 삼았다.

증손은 무과에 급제한
곽자방()으로 충성과 절개가 뛰어나 문려()에 정표()되었으며, 참봉() 곽현()과 교관() 곽지인()은 모두 문장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알려졌으며, 지금의 부사(使)인 곽문용()이 가장 드러난 자이고, 곽문한()ㆍ곽계준() 같은 이는 뛰어나서 범상치 않았는데, 모두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인재였다. 살아있거나 죽은 자손이 모두 수백 명이라서 다 기록 할 수 없으니, 어찌 훌륭한 집안에 대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자손이 그 덕업()과 행의()를 칭송하고 사모하며 더욱 오래 될수록 쇠퇴하지 않으며, 고을 사람들이 장차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을 받드려 하였으나 시의()에 구애되어 결정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식견이 있는 이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도내()의 유생() 박홍조() 등이 일찍이 방백()에게 정문()을 올려 공의 실적()을 조정에 보고하도록 청원하여 높이고 보답하는 은전을 입게 하였는데, 그 글은 바로 충목공() 죽창() 이시직()이 지은 것이다. 또 호남()의 진사() 최운정()이 기록한 바를 살펴보면 공에게 학문()의 공효가 있음을 극구 칭송하면서, “지금 1백 년 뒤에까지 징신()할 수는 없지만 가만히 그 인애()와 은혜가 백성들에게 미친 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그 마음을 얻고 몸을 수양한 효과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들에게 감동케 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이 지극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발현되나니 근본이 없으면 도()가 생성되지 않는다.”하였는데, 지금 최운정의 말과 가승을 서로 번갈아 참고하면 그것이 속이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남 추강()이 점필재(, 김종직())를 스승으로 섬겨 대현()이 되었는데, 지금 공을 대덕()이라고 아울러 칭송하였으니 공이 후현()들에게 존경과 숭상의 대상이 됨은 알지 못하겠다.



≪예기()≫에 이르기를, “선조()에게 아름다움이 없는데 칭송하는 것은 바로 속이는 것이며, 훌륭함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다.”하였는데, 이 세 가지는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 공의 자손 중에는 어진 이가 많은데, 어찌 이 뜻을 모르겠는가? 율곡() 이 선생()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공의 자손을 기용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현인()의 후손이니, 이는 백세()의 공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하였다. 공의 묘소 앞에 그전부터 작은 표석()이 있었는데, 지금 여러 자손들이 장차 그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내가 공에게 외손[]이 된다고 하여 나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였다.

곽은[郭垠]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潭陽府使郭公墓碣

郭氏在沃川郡爲大族。蓋自高麗三司左尹綏元始。其墓在沃川赤登江上基谷里。其三子珣,珪,琦。琦生員。公其子也。諱垠。字岸夫。成化八年壬辰。登第爲持平,掌令。其家乘云。以特命由執義。出爲潭陽府使。以治最陞爲承政院承旨。未及赴召。又按輿地勝覽。輕徭薄賦。邑人愛戴。暴卒于官。人皆悲痛。絶酒肉相弔。至今不忘其惠。忌日致祭。又按秋江南先生孝溫記文。郭侯勤身薄俸。莅事淸修。爲政寬簡。吏畏其威。民懷其惠。孔子所謂人存政擧。可知也。卒于官。歸葬之日。巷哭聲相接。士民相議。歲歲忌還。聚米設齋。以祈冥福。家乘又言魚商不入其境曰。潭民必不食矣。公之曾孫女壻正吳行敏嘗南遊。遇常漢數輩。則相與語曰。明日是郭某忌日也。明日卽十二月十七日也。可見其愈久而愈不忘也。又云公喪旣還行時。什物皆還之。獨一弊笥遺在隱處。夫人見之大驚曰。此物奚在於斯。速還之。毋累夫子之淸德也。此可見齊家之一端也。又按栗谷先生文集。大司成申自繩。卽先生外曾祖。據此則公其女壻。而先生外翁命和之私也。墓在郡南東林山。申氏祔焉。生三男。長之翰進士。次之屛萬戶。次之楨生員。孫正字詩。以文章名於世。士子取以爲程式。曾孫及第自防。忠節卓然。命旌門閭。參奉鉉,敎官志仁。皆以文行薦聞。今府使文溶其最顯者。而若文漢,洎埈。雖其秀而不實。而皆間世才也。存沒摠數百人。不能盡錄。豈其善家之報歟。至今子孫誦慕其德業。稱思其行義。愈久而不衰。郡人將立祠俎豆之。而拘於時義。未果焉。識者恨之。道內儒生朴弘祚等嘗呈文于方伯。請以公實跡上聞。俾蒙崇報之典。而其文卽忠穆公李竹窓時稷所著也。又按湖南進士崔雲挺所記。則極稱公有學問之功。今不可徵信於百年之後。而竊以其仁恩之及於民者觀之。則可見其得於心修於身之效也。不然則其感於人者。何如是其至也。有諸內者。必形諸外。無其本則道不生焉。今以崔說與家乘互相參考。則可見其不誣也。況秋江師事佔畢齋。以爲大賢。而今以公並稱大德。則公之爲後賢尊尙可知也。記曰。先祖無美而稱之是誣也。有善而不知不明也。知而不傳不仁也。此三者君子之所恥也。今公之子孫多賢。豈不知此義也。栗谷李先生秉銓時。將用公子孫而曰。此賢人之後也。此可謂百世之公案也。公墓前舊有小表。今諸子孫將豎碣於其隧。而以余爲公之彌甥。俾余記之。崇禎紀元戊辰十月日。彌甥致仕奉朝賀宋時烈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