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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교평리 군수 박정빈애민선정비(靑山面 校平里 郡守 朴正彬愛民善政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교평리 군수 박정빈애민선정비(靑山面 校平里 郡守 朴正彬愛民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23. 18:21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에 박정빈에 대해서 나오고 있다.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9월 9일 양력 3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박정빈, 민영은 등을 집포관으로 임명하여 비적을 체포하도록 하다.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요즘 잡된 무리들이 감모궁(感慕宮) 공사비를 구실로 핑계를 대고 고을에 출몰하여 강제로 돈과 재물을 빼앗습니다. 사목(司牧)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이치상 응당 나타나는 대로 엄하게 금지해야 하는데 경상북도 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윤헌(尹)은 도리어 의기투합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부리는 노비들과 잡된 무리들을 내놓아 각군(各郡)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서 공사를 돕는다는 명색으로 돈을 긁어내게 하고 있습니다. 큰 고을인 경우에는 1, 2만 냥이나 되고 작은 고을인 경우에도 몇천 냥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므로 온 도(道)가 소란스럽고 떠도는 소문이 낭자(狼藉)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본부(本府)에서 잡된 무리들을 잡아 올리는 동시에 이유를 명백히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여러 번 전보(電報)로 신칙(申飭)하였으나 며칠이 지나서야 대충 회전(回電)을 하였습니다.

들리는 말이 갈수록 더욱 놀랍고 백성들이 못살겠다 아우성치고 있으니 이것은 하루를 내버려두면 하루의 피해가 된다고 할 만합니다.

경상북도 관찰사 윤헌을 우선 본 벼슬에서 파면시키고 법조문을 적용하여 징계하며 내부(內部)로 하여금 명령을 띄워 이미 거두어들인 돈을 조사해서 하나하나 해당 백성들에게 돌려주어 민심에 사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은 어느 때인들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만 하물며 곤궁이 심해서 목숨을 부지해 나갈 수 없는 이런 때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온갖 배들이 침범하여 빼앗는 것을 엄금(嚴禁)하는 문제를 가지고 조서(詔書)로 타이르고 전보로 신칙한 것이 여러 차례일 뿐만 아니었고, 이제는 그런 폐단이 없어졌다는 회전을 간곡하게 하고는 이처럼 연줄을 놓아 학정(虐政)을 더 심하게 하여 소문이 자자하니 더욱 극히 통탄할 노릇이다.

해당 관찰사 윤헌을 본 벼슬에서 파면시키고 법부(法部)로 하여금 법조문을 적용하여 엄하게 다스리며 이미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인 돈은 낱낱이 조사하여 일일이 도로 돌려주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비적(匪賊)들을 소멸하고 체포하는 일 때문에 이미 집포관(戢捕官) 몇 원(員)을 차하(差下)하였지만 아직 삼남(三南)에 고르게 분배되지 못했습니다.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서 비적(匪賊)들의 준동이 아직 그치지 않고 동학 비적(東學匪賊) 잔당들이 다시 날뛰며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세력이 커지도록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목천 군수(木川郡守) 박정빈(朴正彬), 괴산 군수(槐山郡守) 민영은(閔泳殷), 청산 군수(靑山郡守) 송희완(宋熙完), 만경 군수(萬頃郡守) 정인희(鄭寅羲), 해남 군수(海南郡守) 이용우(李容愚), 돌산 군수(突山郡守) 마준영(馬駿榮), 용궁 군수(龍宮郡守) 장용환(張用煥), 의흥 군수(義興郡守) 조병유(趙秉瑜), 김해 군수(金海郡守) 이근홍(李根洪), 거창 군수(居昌郡守) 이용익(李容益)을 모두 집포관으로 차하하고 이어서 각기 구역을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기찰(譏察)하고 체포하는 일을 분담하여 관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비석의 전면에는 행군수박후정빈애민선정비(行郡守朴侯正彬愛民善政碑)라고 각자되여 있습니다.



을사보호조약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된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난 거국적 항일운동을 말한다.

일제는 러일전쟁 발발 3개월 만인 1904년 5월 이미 한국병합을 위한 기본정책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여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국침략을 승인받거나 혹은 묵인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뒤 1905년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한국은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민은 을사조약이 곧 국가의 멸망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한민족을 분격시켜 거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항쟁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선 것은 언론계였다.

특히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 》에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 〉라는 논설을 발표,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에 조인한 매국대신들을 통렬히 비난함으로써 전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장지연은 경무청으로 잡혀갔으며,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 등이 계속해서 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각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조약반대운동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전국민의 항쟁을 유도, 고무시켜갔다.

언론계의 활동과 더불어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에 의한 상소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이 강제체결되던 17일 밤에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거부방안을 상주하였다가 얼마 뒤 면직처분을 받았다.

의정부참정 이상설()도 19일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어 박제빈()·이유승()·정명섭()·조세환()·고익상()·김종호()·윤태영() 등이 같은 취지의 상소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또한, 유생들은 서울에 대한십삼도유약소()를 두고 21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하였다.

한편, 가평에서 신병을 요양하고 있던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는 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즉각 상경하여, 26·27일 이틀 동안 이근명()·민영환() 등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 매국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상소하였다.

12월에 들어서도 전찬정() 최익현()을 필두로 강원형()·곽종석()·전우()·이승희() 등 조야로부터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이 계속되었다. 한편, 고종은 열강의 동정을 얻어 조약 파기를 선언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약 강제 체결 직후인 11월 22일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ulbert, H. B.)와 프랑스주재한국공사 민영찬() 등을 미국무장관 루트(Root, E.)에게 파견하여 한국정부의 처지를 전달하고 미국의 대한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못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측에 통고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상소운동과 더불어 순국항쟁이 일어났다. 전 참판 홍만식()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특히,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11월 30일 울분에 차 고종과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할복자결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일운동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병세도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한 뒤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두 원로대신에 뒤이어 전 참판 이명재(), 학부주사 이상철(), 이설(), 송병선() 등도 잇따르며 자결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유생·관료들뿐만 아니라 일반민중들도 조약 강제체결 소식에 일제히 분기하였다. 서울 종로에 있던 육의전이 상업회의소()의 결의로 철시를 단행하자, 시내의 모든 상가도 여기에 동조, 철시함으로써 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와 여기에 협조한 매국적신들을 규탄하였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행,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나인영()·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상소·순국 등 소극적 저항과는 달리, 일제와의 직접 항전을 통해 주권을 되찾으려는 무력항쟁인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906년 2월 전 참판 민종식()·이세영()·채광묵() 등은 함께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같은 해 6월최익현이 임병찬()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일대를 진동시켰고, 영남에서는 정환직()·용기() 부자의 산남의진()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신돌석()도 평해·영덕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그 밖에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도 우동선()·이진룡(박정빈() 등이 이끄는 의병진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펼쳤다.

결국, 항일투쟁을 전제로 한 을사조약반대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밖으로는 일제침략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항일운동이었고, 안으로는 부일매국노 규탄과 실력양성을 위한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을사조약반대운동[乙巳條約反對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