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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갈평리 송선생강도유허비(馬老面 葛坪里 宋先生講道遺墟碑) 본문
마로면 갈평리에 있는 강와(剛窩) 송선생의 강도유허비(講道遺墟碑)입니다. 밭과 밭사이 둔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돌보는이 없이 외롭습니다 비석은 단기 4312년(서기1979년)에 세워졌습니다.송은헌(1876년(고종 13) ~ 1945년)은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경식(敬植), 호는 강와(剛窩). 아버지는 병택(秉澤),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준(秀俊)의 딸이다. 10세에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3세에 어윤적(魚允績)에게 취학하여 학업에 전념하였고, 1898년에 이근원(李根元)에게 사사(師事)하였다.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소식을 듣고 ‘오적(五賊)을 토멸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인류가 멸할 것이니 지사(志士)들은 분발하여야 한다’고 충동하였다.1909년 스승 이근원 소상 때 고한 제문(祭文)으로 인해 투옥 되었는데, 그는 ‘너희들이 주는 음식은 안먹는다’ 하고 식음을 전폐하니 고사리를 드리며 백이숙제에 비유하니, 그는 ‘백이숙제가 원수의 감옥에 있었으면 고사리를 먹었겠느냐 네 어찌 고사리로 조롱하느냐’고 호통하였다.또, 제문 내용을 힐문하며 그 문의(文義)가 배일사상이 노골적이니 장차 의병을 일으켜 난동을 할 작정이냐고 묻자 ‘이 지극한 분개로 장거(壯擧)할 생각이나 갇혀있으니 어찌할고’ 하였다. 왜노가 책상을 치거늘 ‘이놈들아 너희가 이지경이 되었으면 조용히 앉아 있겠는가’ 하고 호통하였다. 1910년 왜구가 강점하자 통곡하며, ‘(忍痛含寃 準保衣冠 朝聞夕死可 : 원통함을 간직하고 참으며 문화를 보존하고 아침에 진리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 13자로 의(義)를 삼고 유교의 명맥을 보전해서 내세(來世)의 터전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강와집(剛窩集)』·『병의록(秉義錄)』이 있다. 송은헌[宋殷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와집(剛窩集) 은 근대의 유학자 송은헌(宋殷憲)의 시문집입니다.
1960년 송은헌의 손자 송공호(宋貢鎬)가 편집 · 간행하였으며, 여기에 습유 · 부록을 합하여 1980년에 12권 1책으로 재발행하였다. 권두에 이지풍(李之風)의 해제와 권말에 송공호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본집 6권, 습유 · 부록 6권, 합 12권 1책. 활자본.
1·2에 시 240수, 권3·4에 서(書) 54편, 권5에 잡저·서(序)·기(記)·제발(題跋) 합 16편,
권6에 고축(告祝)·제문·묘갈명·묘지명·가장(家狀) 합 26편, 습유 권1에 시 36수, 서(書) 35편, 권2에 잡저·서(序)·명(銘)·고문(告文)·제문·유사(遺事) 합 23편, 부록 권1에 연보, 권2에 유사 등 8편, 권3에 병의록(秉義錄), 권4에 당서요지(塘書要旨)·행록(行錄)·묘표·발문 등이 실려 있다.
시에는 옥중에서 망국의 한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옥중작(獄中作)’이 있다.
서(書)의 ‘상조봉운(上趙峯雲)’에서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미발(未發)·이발(已發)로 구분하고, 미발의 본연지성은 선(善)이며, 이발의 기질지성은 선악이 겸한 것임을 밝혔다.
‘답어승여(答魚升汝)’에서는 스승 이근원(李根元)의 소상(小祥: 사망한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때 올린 제문에 ‘국망위지통(國亡爲至痛)’ 등의 문구를 사용하여 일본경찰에 잡혔을 때의 일을 언급하였다. ‘답박성직(答朴聖稷)’에서는 국가가 망하여 유교의 명맥이 끊기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유림들이 분발하여 민족자존의 대의로써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설 것을 강조하였다.
명의 ‘등명(燈銘)’은 등잔불을 의인화하여 형기(形氣)·심덕(心德)에 비유하고 심성을 닦아 덕을 밝힐 것을 다짐한 글이다. 잡저의 ‘식마론도설(息馬論道說)’은 중국 고사를 예로 들어 왕도정치를 설명한 것으로, 위정자가 덕으로 다스리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나 법으로 국민을 억압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병의록(秉義錄)은 강와집(剛窩集) 권3, 강와집(剛窩集) 부록에 수록된 ‘병의록’은 송은헌의 항일 투쟁에 관한 사실을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 실려 있다.
건국포장 (95년) - 공적내용 호(號:剛窩)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 군자금을 지원하고, 1919년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송은헌은 일찍이 어윤적의 문하에 수학해서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신독근수(愼獨謹守)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더니, 이어서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그는 을미사변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복수보형(復讐保形)의 4자를 머리맡에 걸어 두고 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침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의병은 유생이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 사상적 배경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이념으로 하고 존왕적(尊王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중에도 유인석 의진은 가장 전투적 성격을 띠고 활발하게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유인석 의진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유인석 의병진에 3백 냥의 군자금을 제공한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10년 주권이 상실되자 유인석 의병장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려 하였지만, 스승 어윤적이 때가 좋지 않다고 극구 만류함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유인석 의병장을 기리는 항일문구의 제문으로 일제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옥중에서도 "오늘날 옥중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홀로 작은 충성을 바치며 웁니다"라는 옥중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공식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모두 5개조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다.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송은헌과 관계된 사람으로 유인석을 꼽을수 있다. 유인석(柳麟錫, (1842. 1. 27 ~ 1915. 1. 29)은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庵). 한말의 의병장이다.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항로(李恒老) ․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될 때 유생들과 함께 바대 상소를 올렸고, 1893년 그는 제천 장담으로 이사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 ․ 제천(堤川)에서 싸워 부패한 관리들을 죽이고 충주성을 장악하였으나 곧 장기렴(張基簾)의 관구에 져서 단양(丹陽)으로 물러났다. 재차 친일 개화파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한 뒤 관군을 피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으로 피신하였다.1897년 고종의 유지(諭旨)로 잠시 귀국했다가 1908년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상설 , 이범윤 등과 함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십삼도의군통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두만강으로 쳐들어오려다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즉시 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인근에 산재한 주요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았다. 1913년 동서양의 문물제도 등을 문답체의 형식으로 논술한 유명한 ‘우주문답’을 저술, 간행하였다. 그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의 방취구(芳翠溝)에서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 ‘소의신편 昭義新編’ ․ ‘화동속강목 華東續綱目’이 있다.
송조(宋早)는 송은헌의 아들로 성리서(性理書)를 저술한 조선시대 문신 송재인(宋在寅)에게 가정 교육을 가르쳤다. 송재인은 성(誠)과 경(敬)을 배워 실천을 독실하게 하였다. 인물(人物)의 본성이 다르다고 한 것은 태극은 동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고 성리는 정적을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심은 기이고, 명덕은 이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설을 중심 논지로 삼아 당시에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도 스스로를 지킴이 엄숙하여 의발을 보존하였다. 송재인은 초명은 재중(在中). 자는 공보(恭甫), 호는 회당(悔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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