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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성도리 연자방아(道安面 城都里 연자방아)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성도리 연자방아(道安面 城都里 연자방아)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4. 16. 21:18

 

 

 

 

도안면 성도리로 불리우는 화성1리 마을회관옆에 위치한 인가의 대문 옆에 있는 연자방아입니다.

 

 

 

성도리(城都里) : 화성1리는 ‘성도리’,‘귀봉정’,‘비석촌(碑石村, 비선거리)’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비석촌’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성도리’와 ‘귀봉정’이 화성1리를 구성하고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성도리(城都里)’로 기록되어 있다. 성도리는 화성리의 북쪽 끝으로, 송정리(松亭里)ㆍ광덕리(廣德里)와 이웃하고 있다.

 

‘성도리’라는 이름은 이 마을이 이성산의 옛 토성 터 안에 자리한 고장이라서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도리’라는 지명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이곳은 처음에는 마한의 옛 땅이었으나, 후에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신라,백제와 각축전을 벌였던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병영을 세워 낮에는 청장년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성도리는 왼쪽 산줄기가 ‘매봉’에서 북쪽으로 ‘비석촌’을 향하여 뻗었고, 또 한 줄기는 도안초등학교로 뻗어와 마을을 껴안고 있어 마을은 동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을 앞으로는 음성군 백마령(白馬嶺)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문암천(文岩川)이 흐르고, 이 내를 건너 나지막한 백곡현은 안산(案山)이 되어 북에서 남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멀리 보강산이 조배산(朝拜山)이 되어 삶의 터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북서쪽의 두타산 영맥은 거센 추운 바람을 막아 주어 수리와 장풍이 알맞아 의식이 풍족하고 인물이 많을 길지로 여겨졌다. 풍수지리로 말하면 복해형(伏蟹形)으로, 게가 ‘성도리’를 감싸 안으면서 앞의 냇물을 향해 있다. 수구(水口)는 북동쪽에서 남쪽을 향해 흐르고 있는데, 넓은 들을 적셔주는 크나큰 보(洑)가 있다.

 

성도리가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제일 먼저 터를 잡은 사람들은 곡산연씨(谷山延氏) 눌문파(訥文派)의 연예수(延禮秀)가 이곳에 정착하면서이다. 가까운 ‘명암’에서 분가하여 농사를 짓기에 편리한 이곳으로 이거하여 터전을 마련하면서이다. 이후 전주이씨,경주이씨,강릉김씨,안동김씨 등이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에 보통학교가 이곳에 개교하면서부터이다. 도안초등학교(道安初等學校)가 1925년에 ‘도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면서 초등교육은 이곳에서 전담하게 되었고, 도안면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도리는 동제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다져왔다. 마을에서는 전통적으로 음력 정월 보름에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동제(洞祭)를 행하고 있다. 이 마을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악대가 조직되어 마을의 큰일에는 흥겨움을 더해 주고 주민들의 단합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악놀이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성도리에는 청안동헌(淸安東軒)인 ‘안민헌(安民軒)’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도리에 도안현이 있을 때의 일인데, 현감 부인의 미모가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의 금슬도 매우 좋아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러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현감 부인이 이성산에 있는 한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 아들을 얻으려다 스님과 눈이 맞아 방종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현감은 부인을 사형시키고, 충청도관찰사에게 상소하여 도안현을 폐쇄하고 청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도안면지편찬위원회, 2001: 220~221). ,귀봉정(歸鳳亭)/구궁정(舊弓亭) : ‘성도리’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九花/구봉졍이’로 기록되어 있다. ‘귀봉정’은 세종대왕 6세손이며 호조참판을 지낸 이중재가 ‘귀봉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기에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달리 ‘구궁정’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예전 활터’로 풀이된다. ‘구궁정’은 궁터가 있었고 활촉과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관련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활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을 볼 때는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구궁정골 : ‘구궁정’ 남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구궁정골’은 ‘구궁정’과 ‘골’로 나뉘며, ‘구궁정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구궁정앞들 : ‘구궁정’ 앞쪽[북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구궁정앞들’은 ‘구궁정’과 ‘앞들’로, ‘앞들’은 다시 ‘앞’과 ‘들’로 나뉜다. 따라서 ‘구궁정앞들’은 ‘구궁정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도안수리조합저수지(道安水利組合貯水池)/연암저수지(硯岩貯水池) : ‘성도리’ 서쪽에 있는 저수지로, 1956년에 축조되었다. 본래 명칭 ‘도안수리조합저수지’ 대신 ‘연암저수지’로 더 알려져 있다. 노암,괴정에서 북쪽으로 ‘베루재고개’ 밑에 있는 저수지까지 연결된다. 모정골(茅亭-) : ‘귀봉정’ 앞 충북선 철도와 ‘행갈’,‘뱀티’에서 내려오는 제방 길과 만나는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모정골’은 ‘모정’과 ‘골’로 나뉘며, ‘모정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모정’은 ‘짚이나 새 따위로 이은 정자’를 말한다. 이중재가 ‘귀봉정’에 살고 있어, 청안현감이 신변을 보호하는 예우로 모정을 지어 지키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비석촌(碑石村)/비석거리(碑石-)/비선거리[碑石-]/비성거리[碑石-] : ‘귀봉정’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농경지로 변했다. 옛날 이곳에는 비문(碑文)이 없는 비석이 한 개 있었으나, 1941년에 수해로 매몰됐다고 한다. 이 비석으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없어진 비석은 ‘귀봉정’에 사는 이 참판 댁을 방문할 때의 하마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국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 ‘비석촌(碑石村)’이 보이고,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碑石/비션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비석촌’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성도리’에 속하게 되었다. ‘비선거리’나 ‘비성거리’는 모두 ‘비석거리’의 변화형이다. 비성거리들[碑石-] : ‘비석촌’ 서북쪽에 있는 넓은 들이다. ‘비성거리들’은 ‘비성거리’와 ‘들’로 나뉘며, ‘비석거리에 있는 둘’로 풀이된다. 소탁골 : ‘귀봉정’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탁골’은 ‘소터골’의 변화형이다. ‘소터골’은 ‘소터’와 ‘골’로 나뉜다. ‘소터’는 ‘솔터’에서 치조음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여기서 ‘솔’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솔다[좁다]’의 어간 ‘솔’이니, 그렇다면 ‘솔터골’이나 변화형 ‘소탁골’은 ‘좁은 터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소나무’의 뜻이니, 그렇다면 ‘솔터골’이나 변화형 ‘소탁골’은 ‘소나무 터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텃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원모링이(院-) : ‘비석촌’ 위쪽 산모퉁이로, ‘둥구머리’ 앞에 있다. ‘원모링이’는 ‘원모롱이’의 변화형이다. ‘원모롱이’는 ‘원모롱’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으로, ‘원이 있는 모퉁이’로 풀이된다. ‘원’은 ‘고려,조선시대에 역과 역 사이에 두어, 공무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여관’을 말한다. 정문거리(旌門-) : 도안초등학교 앞의 거리이다. ‘정문거리’는 ‘정문’과 ‘거리’로 나뉘며, ‘정문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연종록부부정효각’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탑골(塔-) : 도안초등학교 뒤 골짜기이다. ‘탑골’은 ‘탑’과 ‘골’로 나뉘며, ‘탑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옛날에 탑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나, 현재 탑은 없다. 활터 : ‘성도리’ 뒷산 능선에서 ‘귀봉정’ 산 쪽을 향해 있는 터이다. 옛날에 활을 쏘는 무력 단련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증평문화원]

 

 

 

 

 

성도리에는 청안동헌인 안민헌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도리에 도안현이 있을때의 일인데 현감부인의 미모가 매우 뛰여났을뿐만 아니라 부부사이의 금슬도 매우 좋아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러나 슬하의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현감부인이 이성산에 있는 연천사에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 아들을 얻으려다 스님과 눈이 맞아 방종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현감은 부인을 사형시키고 충청도 관찰사에게 상소하여 도안현을 폐쇄하고 청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