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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교평리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靑山面 校平里 東學革命軍再起包紀念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교평리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靑山面 校平里 東學革命軍再起包紀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4. 23. 11:04

 

 

청산면 교평리 청산대교 옆 비석공원에 건립되어 있 는 이 비는 전면에“東學革命軍再起包紀念碑(동학혁명군재 기포기념비)”라고 세로로 음각되어 있다. 비석 뒷면에는 비의 유래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옛날 청산현이라 하던 이곳은 동학혁명 때인 포덕 35 년(1894) 10월 16일(음 9.18.)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어른이 전 동학군에게 재기포령을 내린 역사적 인 고장이다.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군은 그해 6월 궁 궐까지 점거하면서 주권을 유린하였고, 이어서 청일전 쟁을 도발하여 중국대륙을 침범하며 우리나라를 강점하 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해월신사는 “호랑이가 몰려들어 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라고 하며 전 동학군에게 항일전에 나가 도록 기포령(총동원령)을 내렸다. 동학군들은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도처에서 일어 났으며 11월 18일에는 청산에 모여 대회를 열었다. 이 모임에서 동학군 북접 통령이 된 의암 손병희는 해월신사의 명교에 따라 논산으로 출동하여 11월 13일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호남 동학군과 합류하였다. 11월 17일 경천점으로 진출하여 이인에서 관군을 물리치면서 공주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우금치를 사이에 두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수십 차례 공격 하면서 엄청난 피를 흘린 동학군은 12월 7일 적의 기습을 받아 수많은 희생을 당했으며 논산 과 원평에서 저항을 했으나 당해 낼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해월신사와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군 은 다시 영동 용산전투와 청산전투, 보은전투를 거치며 저항하다가 이듬해 1월 19일 음성 금 왕읍 되자니에서 최후의 전투를 끝으로 동학혁명은 막을 내려야 했다. 비록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동학혁명은 성사되지 못했으나 조국과 민족의 앞길을 열기 위한 동학혁명 정신은 1904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 2편2장Q-유형문화유산(1117)_5차_1안 -236-463 14. 12. 24 오후 4:03 페이지 399 제2편 역 사 와 전 통 400 년의 갑신개혁운동과, 1906년의 의병활동, 그리고 1919년의 3·1독립만세운동, 1920년대의 신 문화운동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에 우리 후학들은 해월신사의 보국안민 정신을 기리 기 위하여 순도 100주년을 맞아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한다.(천도교 중앙총무부)

 

 

 

교평리(校平里)는 청산현 현내면 저전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지전리와 교평리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739년 기록에는 청산현 현내면 저전리라 하여 194호가 살았고, 1897년 기록에는 227호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청산군을 없애고 옥천군에 소속시키면서 청산면이라 하였고 이때 저전리를 지전리와 교평리로 나누었다.교평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을 합하여 이름 지을 때 향교란 말의 교(校)자와 평상목의 평(平)자를 한자씩 취하여 교평리라 하였다.이 마을의 청산향교는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창건하여 효종 때 교평리로 옮긴 것으로 이때부터 향교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리 다리밟기의 풍속이 이어지고 있는 교평리는 향교말(교동), 데골, 평상목 등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고 홍문거리, 노루목, 한다리 등의 지명이 있다. 보청천변의 비석거리는 청산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교평리는 ‘짝짜꿍’ ‘졸업식노래’ 등을 작곡한 정순철 동요작가의 출생지이다.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에 조성되여 있는 동학혁명기념공원입니다.

한곡리(閑谷里)는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장위리에서 한곡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1739년이나 1891년의 기록에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라 하여 129호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2007년말 현재 45호 95명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 때 청산군이 없어지면서 옥천군에 소속되고 현내면과 동면 등이 합하여 청산면이 되었고 장위리가 장위와 한곡으로 나뉘었다.

 

한곡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 마을이 옛이름으로 “한골”과 "문바위“로 불리고 있는데 한자를 쓰면서 ”한골“을 발음대로 한곡(閑谷)이라 썼으나, 이 한골의 원뜻은 옛글로 ”한“은 크다는 뜻으로 "골이 크고 넓다”는 말이 되므로, 뜻대로 한다면 대곡(大谷)이 될 것이다. 한곡이라 한 것은 ‘한가하고 조용한 골짜기’ 또는 “한밭(大田)”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문바위는 마을뒤에 큰 바위들이 여러 개가 서로 기대어 서있어 마치 문과 같이 생긴 바위라 하여 문바위라 부른다. 문바위(門岩)에서 300m 동남쪽 산비탈(장군봉)엔 장수발자국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남아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나라 재상의 아들 웅인이 금기를 어기고 마을사람을 괴롭히는 괴물을 죽이려고 무술을 썼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웅인을 사랑했던 옥황상제의 딸 계화도 내려와 함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비스듬히 경사진 곳에 사람모양의 바위 두개와 웅인이 괴물과 싸울 때 생긴 발자국 모양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다.

 

1893년 4월 동학교도 수천 명이 교주인 최시형과 집회를 하다가 관군에게 쫓겨 보은(보은 장안- 후에 4. 2 보은집회)으로 갔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새서울 : 사람들이 들끓어 새로운 서울). 문바위에 주동자인 박희근 등 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피난 온 최시형은 아는 것이 많고 잘생긴 김낙현(안산김씨)의 집에 기거하며 김낙현과 시국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마을에 거주하던 동학도들이 보은으로 퇴각 후 관군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동학군을 고발시 현상금을 내걸어 한골로 피난해 있던 김낙현은 1898년 4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문바위 뒷산에 묘가 하나 있는데 최시형의 묘라고 하여 얼마 전까지 마을에서 사초와 벌초를 했는데 최시형의 묘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아마 최시형교주의 아들인 최봉주의 묘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한골과 문바위 두개의 마을로 되어있으며 한곡저수지는 1987년 축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