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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면 성본리 어재연.어재순묘지(大所面 城本里 魚在淵.魚在淳墓地)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대소면 성본리 어재연.어재순묘지(大所面 城本里 魚在淵.魚在淳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5. 15. 10:47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있는 함종인 아재연,어재순의 묘지입니다.

충청북도기념물 제 162호로 지정되여 관리하고 있다.



성본토성은 대소면 성본리의 최성미 동남쪽 구릉에 있는 작은 토루이다. 성 안에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에서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 형제의 재실인 쌍충재가 있고, 그 뒤에 묘소가 있다.그 아래로는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어재순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 형 어재연이 진무중군이 되어 광성보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백의종군하였다. 그해 6월 미국 해병대와 싸우다가 형과 함께 전사하였다.형인 어재연의 묘지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본관은 함종()이고, 자는 성순()이다. 신미양요 때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어재연()의 아우이다.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형을 대신하여 향리에서 집안을 돌보았다. 1871년(고종 8) 미군이 강화도를 침범하는 신미양요가 일어나 형인 어재연이 진무중군()으로 급파되어 광성보()를 지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의종군하여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것을 선언하고는 강화도로 갔다.

그해 6월 11일 킴벌레이 중령이 이끄는 450여 명의 미국 해병대가 공격해오자, 3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형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어재순의 묘지앞에는 단기4306년에 후손들에 의해 새로 신설된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증통정대부이조참의함종어겅재순지묘(贈通政大夫吏曹參議咸從魚公在淳之墓)라고 표기되여 있다.






어재연(魚在淵)은 1823(순조 23)∼1871(고종 8) 조선 후기의 무장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을 수비한 명장이다.

본관은 함종(). 자는 성우(). 용인()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광성보()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이다. 어재연 [魚在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함종어씨종중에서 옆의 아우인 어재순과 함께 비석을 신설하였다.

비석의 전면에는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삼군부훈련원사행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겸오위도총부부총관증익충장함종어공재연지묘(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三軍府訓鍊院事行嘉善大夫行驤衛護軍兼五緯都摠府副摠管贈謚忠將咸從魚公在淵之墓)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단기 4306년에 비석을 세웠다.





어재연과 어재순을 모시는 재실인 쌍충재이다.



어재연과 어재순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각을 세우기 위해 주춧돌등을 마련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