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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강면 금호리 검담서원묘정비(芙江面 黔湖里 黔潭書院廟庭碑) 본문
검담서원묘정비(黔潭書院廟庭碑)는 부강면 금호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766년에 세운 것으로, 서원의 건립내력과 송준길의 일생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다. 글은 김원행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의 후손 송명흠이 썼다.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되었다. 2012년 세종시 편입에 따라 해제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31일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묘정비(廟庭碑)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의현 서쪽 형강의 하류에 검담서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 동춘 송선생이 그 물과 산의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이 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머물면서 정자이름을 보만(보만)이라 하고 때때로 걸음하여 놀고 쉬면서 도학을 강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선생이 죽은 후에 비로소 송규암(宋圭菴,송인수)등 제현과 함께 노봉서원에 병향되었다. 얼마후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선생에게 감단은 회옹(晦翁 주자)의 무이(武夷)와 같으니 마땅히 이 곳에만 전적으로 제향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숙종 을해년(1695)에 드디어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를 옮겨와서 봉안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검담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로부터 72년 후에 비로소 서원뜰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나 김원행(金元行)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부탁하였다.
아 내가 어찌 감히 서술할수 있겠는가 마는 그 부탁을 물리칠수 없어 삼가 절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선생의 휼룡한 덕과 위대한 업적이 당시에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기린과 봉황이 교야(郊野)에 나타나고 화창한 바람과 단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한것과 같으며 세상의 교화를 끝이 없도록 붙잡아 지탱한것은 또 해와 별이 하늘에 있고 강과 하천이 땅에 있는것 과 같으니 선생과 같은 사람은 어찌 세상에서 뛰어난 대현이 아니겠는가? 사우(師友)의 연원이 아름답고 군신의 계합(契合)이 특별한것 또한 옜날과 지금에도 드문것이었다.
대체로 주자로 부터 세대가 멀어지면서 참다운 선비가 나오지 않았는데 조선조에 와서 문성공이 선생(이이)바로소 전체대용(全體大用)의 학문으로 멀리 주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우리 송선생으로 말하면 명석하고 순수하며 뛰어난 자질이 있고 중정순양(中正純陽)의 덕성을 갖추신 분이며 젊은 나이에 도를 찾아 문성공 김선생(김장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사문(師門)에서 물러나서는 우암 송선생(宋時烈)과 도의를 연마하여 그 덕을 성취하였다.
수양이 깊고 쌓인것이 많아 영화가 밖으로 드러나 그 인품이 정제된 금과 윤택한 옥처럼 속과 겉이 투명하며 평탄하고 솔직하며 화락하여 자연스럽게 예법에 맞으니 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흠모하여 위로 조정의 고관으로 부터 아래로 미천한 선비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한결같이 존경하여 한세상의 사표로 생각하였다. 죽은 후에는 또 우암과 함께 문성공과 문원공의 뒤를 이어 공자의 묘정에 나란히 배향되어 크게 사도의 빛이 되었으니 이 것은 그 계통의 참됨이 과연 어떠한가? 인조때 부터 선생은 이미 여러번 부르심을 받았으나 당시는 병자호란을 겪은 시기이기 때문에 천지가 뒤집힌 것을 통분해 하며 초연히 마음을 지키면서 은거하였고 의리상 구차하게 출사하혀고 하지 않았다. 효종이 즉위하여 휼룡한 정치를 일으키고자 하여 두터운 은총과 특별한 예우로 선생과 우암을 초빙하니 이에 선생은 요순이 전한 정일(精一)을 먼저 진달하며 백관의 온갖 직무로 부터 천하의 대계에 이르기 까지 모두 이를 미루어 말씀하지 않은것이 없었는데 그 온화한 말씀이 모두 인의에서 나온 것이였다.그러나 큰 요점은 조정을 바르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하는것을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적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았다.
명나라 조정과 은밀히 내통하기를 청한 한통의 차자(箚子)는 더욱 충의가 격렬하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진정에서 우러나온 한결같은 마음으로 좌우에서 협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지우(知遇)가 더욱 깊어졌다. 드디어 우암과 함께 등용되어 밝게 정치에 참여하여 공적이 날마다 쌓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군신이 서로 믿고 의지한것은 귀신을 감음하게 할 만 하였으니 한나라의 소열황제(昭烈皇帝)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이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저 제갈공명이 배운것은 오히려 왕도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누가 선생과 비교하여 현신과 성군이 서로만나 순수함이 더욱 드러났다고 하겠는가? 만약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삼대(三代)이후에는 이러한 군주와 신하가 없었다고 해도 좋을것이다.
아! 현신과 성군이 서로만난것이 이와 같았으나 도중에 임금께서 승하하여 뜻한 사업을 이루지 못한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그 교화가 미친곳에 천경지의(天經地義)가 유지되고 실추되지 않게 한것은 또한 누구의 은혜인가? 성현이 현신을 만나고 현신이 성군을 만나는 것과 어진 사우를 마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사우를 마난 분은 더러 있으나 성군이 현신을 만나고 현신이 성군을 만난이는 더욱 적은데 이에 선생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하였다. 그리고 수립한 학문과 덕행이 광명하고 뛰어나 지금 천하 후세로 하여금 진유(眞儒)의 공을 알게 하였으니 아! 어찌 진실로 천고에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큰글씨로 써서 돌에 깊이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것이 마땅하다.
선생의 휘는 준길(浚吉)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며 은진인이다. 효종때에 진선(進善)으로 진출하여 찬선 제주 대사헌 대사마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현종 조에서도 대총재 즉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존경과 예우가 줄어들지 않았으니 선생 또한 선왕의 은덕에 보답하기로 결심하고 허적이 여러 작은것 까지 미워한다는 충성스러운 직언을 자주 올렸다. 얼마 후 병이 위독하자 또 상소하여 상신 허적(許積)의 간사함을 강력히 논하였는데 임금이 그 상소를 폐기하고 기뻐하지 않았으나 부고가 전해지자 임금은 탄식하고 슬퍼하며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숙종초에 원흉의 당이 국정을 주도하여 관작을 추삭당하였으나 허적이 역모에 연좌되어 죽은 후에 특명으로 관작을 회복시키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생이 문묘에 종향된 일은 금상(今上,영조)31년에 있었다.숭정(崇禎) 삼주(三周) 병술년(1766) 중하(仲夏)에 외예(外裔)안동 김원행(金元行)이 삼가 찬술하다.현손 명흠(明欽)은 삼가 글씨를 쓰고 두전(頭篆)을 아울러 쓰다.[부강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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