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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산신당(大崗面 龍夫院里 竹嶺山神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산신당(大崗面 龍夫院里 竹嶺山神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8. 31. 18:59



농촌마을이다. 조선시대 때 장림역()에 딸린 용부원()이 있었으므로 용부원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구렁말, 텃골, 대작암 등이 있다. 구렁말은 죽령역앞의 마을이라 하여 역전이라고도 부른다. 텃골은 용부원리의 중심마을로서 조선시대 때 용부원이 있었다 한다. 대작암은 대작암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텃골 남쪽에 다자구야산신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용부원리 [Yongbuwon-ri, 龍夫院里]



죽령산신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 49―9번지에 있는데, 1976년 12월 21일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제천 쪽에서 단양인터체인지를 지나 죽령터널 입구의 우측에 있다.

   죽령산신당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죽령산신을 마을에서는 ‘다자구 할머니’라고 부르고, 산신당도 ‘다자구 할머니당’이라 칭하고 있다. 다자구 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연유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긴 죽령에는 옛날에 산적들이 많아 밤낮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관군도 산이 험준하여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때 한 할머니가 관군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산적 소굴에 들어가 ‘덜자구야’ 하면 도둑이 다 자지 않고 있는 것이고, ‘다자구야’ 하면 산적이 다 자고 있는 것으로 약조를 하였다.

   두목의 생일날에 찾아간 할머니는 밤이 되어 산적들이 술에 취해 모두 잠들자 ‘다자구야’ 하고 외쳤다.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쳐들어가 산적을 소탕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다가,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사당을 지어 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마을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처음 신당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것은 1948년 3월 8일에 주민의 성금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죽령산신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태종실록》에 보인다. 조선시대 태종 14년에악(嶽)·해(海)·독(瀆)을 중사(中祀)로,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삼아 국행의례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죽령산(竹嶺山)은 소사에 포함되었다. 국행을 국가의 기복양재를 위해, 국가의 재화와 용역에 의해, 국가의 공식적인 규범과 논의로 대상신에게 기원하는 제례임을 고려하면, 죽령이 국가에 의해 소사로 등재되기 이전부터 민간에서는 이미 신령스러운 장소로 널리 인식되었을 것이다.죽령산신당에서 모셔지는 신격은 국가수호신으로서의‘다자구할머니’이며 제의에서의 기원은 국가의 번영과 지역민의 안녕이다. 죽령산신제는 수호신제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죽령산신이 부여받은 국가수호신으로서의 종교적 상징성은‘다자구 할머니’설화에서 비롯된다. ‘다자구할머니’는 용부원리 지역민들이 섬기는 신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산신이면서 여신이다. 설화 속에서‘다자구할머니’는 수호신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죽령산신제의 제일(祭日)은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仲丁日)이다. 제일이 다가오면 마을이장이 각 기관단체 단양군청, 단양군의회, 단양군농협조합, 단양문화원,단양경찰서, 대강면사무소, 대강파출소, 대강우체국, 대강초등학교 등에 안내장을 발부한다. 1980년대 중반 즈음, 단양군의 보조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비롯된
도가는 산신제 5일 전에 선출한다. 그러나 명분상의 선출일 뿐, 정연옥(여, 1936년생, 용부원 3리 290번지)이 30여 년 동안 도가 역을 맡아오고 있다. 그녀의 제물을 마련하는 정성과 정결이 남다르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인식된 탓이다. 제물의 구입 및 손질은 그 일체가 도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산신제 전날 목욕재계한후‘단양시장’에 나아가 가장 탐스럽고 신선한 재료를 손이 닿는 대로 구입한다.
산신제 당일 새벽 5시부터 오전 9시 30분까지 제물을 손질한다. 메, 떡, 삼색실과,나물, 포, 술, 희생물 등이다.
메는 큰 솥 안에‘새앙’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작은 솥을 넣고 서 홉 정도의 쌀을 익히는데, 밥의 숙성 정도를 과정 중에는 절대 확인하지 않는다. 떡은 백설기인데, 세 되 양의 멥쌀을 재료로 하며 담백한 맛을 위해 간을 하지 않는다. 삼색실과 로서 대추, 밤, 곶감 등을 준비한다. 나물은 파란색 한 종류와 흰색 두 종류를 준비한다. 파란색 나물로 시금치가, 흰색 나물로 도라지와 무나물이 대표적이다. 다만 들기름으로 볶으면서 약간의 소금간을 할 뿐, 마늘이나 파 등 자극성 있는 양념은 삼간다. 포는 명태 통포를 준비한다. 술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농주(農酒)를 직접 담가 올렸으나, 지금은‘대강술도가’에서 시판하는 막걸리로 대용하고 있다.
희생물은 교미 경험이 없는 검은 돼지인데, 머리만을 따로 진설한다.
산신제 3일 전에 마을 어귀 및 죽령사(竹嶺祠) 그리고 도가집에 금줄을 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역민 모두가 신신제 당일까지 행동을 절제하고 심신을 청결히 하고자 노력한다. 제장의 정비는 산신제 전날 오후에 마을 이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부정한 일이 없는 마을 주민 10여 명을 이장이 소집하여 죽령사에 오르는 길을 깨끗하게 쓸고, 주변에 우거진 나뭇가지를 치며, 오물을 줍는 등 정성을 다하여 제장 주위를 정비하고 신성시한다.
도가에게서 제물의 손질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마을이장 및 집사들이 도가집으로 향해 대문 앞에서 제물을 인도받는다. 이때 부정을 예방하기 위해 대문 안으로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다. 제물의 진설은 봉향(奉香: 향합을 받드는 역할)과 전작(奠爵: 헌관이 주는 술잔을 신위 앞에 바치는 역할)이 맡는다. 대개의 진설이 유교식 예법을 따르고 있다. 한편 제물 진설의 일환으로 죽령산신의 위패에 반으로 두 번 접은 4절의 창호지를 올려놓는다. 죽령의 산신을 모시려 제관들이 며칠 동안 재계하고 또 당일에는 깨끗한 복색을 갖추듯이, 죽령의 산신도‘새 옷으로 치장해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제관은 산신제 당일 참석한 각 기관 및 단체장의 직급 순으로 세 명을 선출한다.
집사 역시 의례 당일 참석한 주민들 중에서 임의로 선출한다. 봉향과 전작이 제물을 진설하는 동안 제관들은 복색을 갖춘다. 이어 촛불과 향이 지펴지면 본격적인 산신제를 시작하는데, 오전 11시 즈음이다. 행례는 죽령산별제홀(竹嶺山別祭忽)에 준한 진행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다만 약식의 진행이 이루
어진다. 먼저 집례가 개사배(皆四拜: 모두 절을 네 번 올리시오.)를 행하라 지시하면 모든 헌관들이 이에 따라 예를 올린다. 이어 초헌관에게 초헌관예관세위(初獻官詣洗位: 초헌관은 나아가 손을 씻으시오.)를 행하라 지시하면, 이내 사당오른쪽에 준비해 둔 대야에서 손을 씻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 향을 세 번 올림) - 집작(執爵: 술잔을 받음) - 헌작(獻爵: 술잔에술을 받음) - 준작(樽爵: 헌관이 술잔을 준작에게 주면 준작은 술잔을 받아 신위앞에 올림)- 배례(拜禮: 예를 두 번 올림) - 퇴잔(退棧: 잔을 내려놓음) - 음복(飮福: 술을 마심) 등의 순으로 산신제를 행한다. 아헌관과 종헌관도 동일한 수순에 의해 의례를 행한다.
산신제를 마친 후에는 진설했던 제물을 음복하고, 죽령사(竹嶺祠) 오른편에 앉아 부녀자들이 마련한 음식(돼지고지, 육개장, 떡 등)을 나누며 죽령산신을 다시 한 번 기린다. 특히 돼지고기를 그 자리에서 익힌다. 기름 냄새를 피워야 죽령산신이 감응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단양군의 보조 및 참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의례에 부녀자의 접근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관의 보조 및 참여가 이루어진 1985년 이후, 이들에게 따뜻한 국밥이라도 대접해야 한다는 마을사람들의 정성으로 부녀자들에게 음식 준비를 맡겼다.[단양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