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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면 중앙리 거북바위(懷仁面 中央里 거북바위) 본문
회인면사무소 북쪽 도로변 동쪽 둑길에 직경 315㎝, 높이 75㎝의 둥근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은 북향의 거북이 형상의 자연석 바위다.본래 이 바위는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북쪽의 자연석 암반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으로 없어지게 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놓았다.매년 음력 시월 초순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위치로 보아 옛 회인현 여단으로 추측된다. 거북이는 길이 110㎝, 높이 49㎝이다.
의료기술의 낙후와 지식등이 전무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돌림병을 연고없이 길에서 죽은 혼령들의 해꼬지로 여겼을 것이다.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을 국가에서 제사 지내주던 제단이 여단인데 그 여단이 거북바위가 아닌가 한다.여단제도는 1401년(태종 1) 좌찬성 권근(權近)의 주청을 받아들여 대명제례(大明祭禮)에 따라
처음으로 북교에 여단을 쌓아 여귀(厲鬼)에게 제사 지낸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각 주현에 명하여 여단을 만들어 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여제([厲祭])란 불운하게 죽었거나 제사지내 줄 후손이 없어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알려진 여귀(厲鬼)를 위로하는 제사.
{여제(厲祭)의 성격} 여귀는 불행한 죽음과 강포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자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을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 줄 가족마저도 없는 외로운 귀신이란 의미이며, 후자는 그가 산 자에게 일으키는 탈이 역병과 같이 모질고 강포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여귀를 여역신(癘疫神)·역병신(疫病神)이라고도 하며, 전염병이 돌때 국가나 마을에서 여제를 지냈다. 이러한 여제는 그 목적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무속의 지노귀굿·씻김굿·망묵굿이나 불교의 천도재 등과 유사한 사령제(死靈祭) 또는 위령제(慰靈祭)이다. 그러나 여제의 명칭이나 그 절차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교적 제사의 절차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인보다 불특정 다수의 여귀를 대상으로 정기적·비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위령제이다.
{여제(厲祭)의 기원} 여제의 기원은 고대 주(周)나라까지 올라간다.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의하면 왕이 지내야 할 일곱 가지 제사[七祀] 중에 ‘태려(泰厲)’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제왕 중에서 후손없이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였다. 제후와 사대부들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공려(公厲)·족려(族厲)라는 이름의 제사가 있었다. 이러한 칠사(七祀) 또는 오사(五祀)는 후대 국가 제사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종묘에도 칠사당이 있었다. 그러나 여제가 독립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다. 천자와 제후, 대부의 계급적 위계와 달리 이 시기 여제는 경도(京都)와 부·주·현(府州縣) 그리고 리(里) 등의 지방 행정조직에 따라 편성되었는데, 특히 이갑제(里甲制)의 시행과 함께 향려단(鄕厲壇)이 전국에 세워졌다. 또한 청명일·7월 15일·10월 1일에 지내는 제의는 그 형식이 성황신을 중심으로 바뀌어 제향일 3일 전에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가 새로 생겼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는 도교와 민간에서 유행한 성황신 신앙을 받아들여 여귀를 통제하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기원하는 형식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여제(厲祭)의 전래} 여제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조선 초기이다. 태종 원년 권근(權近)의 발의로 시작된 여제는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제단과 의주(儀註)가 정비되었으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소사(小祀)로 올려졌다. 한성부 여제는 제향일에 앞서 남교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서 성황발고제를 거행하고, 당일에 북교 여제단에서 성황신(城隍神)과 무사귀신(無祀鬼神)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 형식은 중국과 유사하지만, 명계(冥界)의 주관자로서의 성황신에 대한 이해가 약했던 우리나라에서 성황신의 역할은 축소되고 국왕이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는 구휼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한편 조선 전기에 이미 지방 군현 단위마다 여단이 건립되어, 여제는 사직제(社稷祭)·문묘 석전제(釋奠祭)와 더불어 지방의 중요한 제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여제가 이렇게 전국에 일률적으로 건립된 것은 조선시대 일원적 지방제도의 강화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조선 후기 전쟁과 잦은 전염병의 발생 때문이기도 하였다. 가뭄과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심했던 현종·숙종 연간에 양난(兩難)의 전몰처(戰歿處)와 무주시매처(無主屍埋處)를 중심으로 별여제가 자주 거행되었다. 이렇게 중국에서 수용된 여제는 국가의 중앙집권적 권력, 전쟁의 역사적 경험, 재난의 현실 등으로 인해 점차 토착화되었다.
조선 후기 여제는 각 지방의 동제를 통해서 민간에도 확산되었다. 동제에서 여제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여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지만 여제와 유사한 형식의 동제로서, 여역과 전쟁터의 고을을 배경으로 시작된 은산의 별신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하나는 동제의 명칭이 여제인 경우로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동제로서의 여제는 무사귀신을 위로하는 형식도 있지만 마을수호신을 모시는 다른 제향과 차이점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로하는 제사는 우리의 종교문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제는 조선시대 국가의 지방조직과 구휼이란 대민정책 그리고 여역에 대한 공포와 원혼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향이다. 여제 [厲祭]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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