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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각자 - 조정철(舍人巖刻字 - 趙貞喆)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사인암각자 - 조정철(舍人巖刻字 - 趙貞喆)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2. 12:59




조정철(趙貞喆 1751-1831,영조27년-순조31년)의 각자입니다.충청도관찰사 시절 새긴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강용휘 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참형에 해당했으나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제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풀려나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중추부지사 등을 지냈다.



본관 양주(). 자 성경() ·태성(). 호 정헌() ·대릉(). 1775년(영조 5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별검()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강용휘() 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참형()에 해당했으나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제주에 유배되고, 뒤에 정의() ·광양() ·토산() 등지로 이배()되었다.

1810년(순조 10) 풀려나와 정언() ·동래부사(使)를 거쳐 1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816년 이조참의가 된 뒤 형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1831년(순조 31)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저서에 《정헌영해처감록()》이 있다.



수안보면의 온천리에서 박석고개를 넘어 대안보로 내려가는 옛길은 호젓하고 옛 정취가 느껴진다. 박석고개(돌고개·石峴)를 넘으면 오른쪽으로 큰 묘소가 여러 기 보이는데 그 중 가장 큰 무덤이 조감사(趙監司)의 묘라고 전해진다. 이 묘의 주인공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제주목사(濟州牧使), 충청도관찰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조정철(趙貞喆·1751~1831)이라는 분이다.

조정철의 묘는 조산(趙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옥폭포 암벽에 새긴 조정철의 마애명이 있어 수안보에는 조감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수안보 박석고개(돌고개)에 있는 조정철의 묘지입니다.




조정철(趙貞喆)의 본관(本貫)은 양주(楊州), 자(字)는 성경(成卿), 호(號)는 정헌(靜軒)으로 1751년(영조 41년) 경기도 장단에서 퇴헌공 조영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5년(영조 51) 25세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나 형조판서를 지낸 장인 홍지해(洪趾海·1720~1777)의 정조 시해 음모사건에 노론 벽파 가문에 속한 연유로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를 갔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원년 9월 11일 자에 "조영순(조정철의 아버지)이 아직 살아 있다면 임금을 범한 부도한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그가 죽었기 때문에 처형하지 못했으니 큰 실형(失刑)이라 하겠다. 더구나 그 아들 조정철은 역적 홍지해의 사위인데… 국청의 죄인 조정철은 절도에 사형을 감면해 안치하라"고 조정철의 유배 배경을 적고 있다. 조정철은 유배지에서 제주목 향리를 지낸 홍처훈의 딸 홍윤애(洪允愛·홍랑)와 애절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랑해선 안 될 죄인과의 기구한 사랑이었으니 더욱 애틋하고 간절하였고 두 사람의 마음을 담은 딸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노론파 조정철 집안과 불구대천의 정적이었던 소론파의 김시구라는 사람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목사는 죄를 옭아매어 기어이 사형시키려고 홍랑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을 하였으나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사모하는 이의 목숨이 달려있음을 알고 있는 홍랑은 당당히 맞서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1805년(순조 5) 27년여 만에 사면 복권된 조정철은 1811년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 겸 전라도 방어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생명의 은인이며 사랑했으나 원통하게 죽은 의녀(義女) 홍랑의 묘를 찾아 원혼을 위로하고 딸에게는 집과 토지를 마련해주었다.

홍랑의 묘는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 금덕리 제주농고 자리에 있다가 시가지 확장으로 애월읍 유수암리로 옮겨졌고 '義女 洪娘之墓'라고 새겨진 묘표 뒤에 조정철의 헌시가 있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혼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불과 200여년 전 목숨을 걸고 사랑을 지킨 한 여인에게 바친 한 남자의 애잔함이 담긴 시다.

동래부사를 거쳐 1813년 충청감사(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를 순찰하던 중 수옥정 폭포에 이르러 폭포를 감상하고 암벽에 "조정철(趙貞喆)"이란 마애명을 남겼는데 이름 옆에 새겨진 '을해(乙亥)'를 통해 1815년에 다녀갔음을 알 수 있다.




수안보에 있는 조정철의 묘비에는 '楊洲 趙公 貞喆之墓(양주 조공 정철지묘)' 라 적고 그 옆으로 부인 3명을 부좌(祔左)하였는데 제주 연인 홍윤애를 두 번째 부인으로 올려놓았다. 한라산 백록담에도 조정철이 남긴 마애각(磨崖刻)이 있어 제주도와 충주시는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틋한 순애보를 스토리텔링화해서 관광자원화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충주시는 박석고개, 조정철 관찰사의 사랑 이야기, 거룡목 등을 주제로 스토리텔링하고 조산공원 생태 테마 탐방로와 연계해 수안보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며, 제주도립무용단은 지난 해 48회 정기공연으로 홍윤애와 조정철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한 창작 무용 작품을 선보였고, 제주도에서는 제주목사 조정철과 제주 처녀 홍랑(윤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제주의 설문대할망 설화에 덧대어 오페라 <백록담>을 만들어 제주 뿐 아니라 서울과 룩셈부르크, 스페인, 그리스 등에서 공연하였으며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이 되도록 발전시키겠다고 하니 앞으로 충주와 제주가 상호 문화 예술의 교류 확대와 상호 연계된 훌륭한 테마 관광지 개발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