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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소태면 오량리 보각국사정혜원융탑(蘇台面 五良里 普覺國師定慧圓融塔) 본문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지에 있는 조선 전기 보각국사 석재 부도.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번지 일대에 있는 사지로, 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목할 만한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그동안의 지표조사와 여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의 위축으로 불사(佛事)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부도의 건립도 왕실과 관련된 일부 고승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청룡사지에는 고려 말기 주요하게 활약하다가 1392년 9월 입적한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1320~1392]의 부도를 비롯하여 탑비·석등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계의 위축으로 불사(佛事)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부도의 건립도 왕실과 관련된 일부 고승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청룡사지에는 고려 말기 주요하게 활약하다가 1392년 9월 입적한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1320~1392]의 부도를 비롯하여 탑비·석등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사찰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부도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에게 세워졌던 사후(死後) 기념적인 조형물이었다. 조선 초기까지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다. 보각국사는 고려 말기 주요하게 활약한 고승으로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던 승려였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로부터도 상당한 공경을 받았다.
보각국사 혼수는 1392년 7월 태조 이성계의 즉위에 축하를 표하고 곧바로 병을 핑계 삼아 충주 청룡사로 하산하였다. 1392년 9월 18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세수 73세, 법랍 60세)하였는데, 이에 문도들이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보각국사의 부음을 듣고 내신(內臣)을 보내서 조문하고 부도 건립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태조는 또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호(塔號)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내리고, 1392년 12월 청룡사 북봉(北峰)에 부도를 세워 유골을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보각국사는 여러 왕들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고, 국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후원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부도는 크게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평면 팔각의 지대석과 하대석으로 결구되었는데, 1976년 복원 당시 지대석 하부에서 석실(石室)이 발견되었다. 즉 보각국사 유체를 화장한 후에 유골을 수습하여 지대석 하부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상면에 단판 16엽의 세련된 연화문을 장식하여 공양의 의미를 더하였다.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형의 별도 화형 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인다.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각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운룡문(雲龍紋)과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사자상과 용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으며 수호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상하로 대칭되도록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상부에 높은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탑신석은 상대석 상면에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삽입·고정되도록 했으며,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둥은 중국에서 원나라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성행한 양식이었다.
탑신석 각 면에는 1구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부도에 대한 강한 수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하부에 넓은 받침과 추녀와 사래가 번안되었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마루부는 높게 돌출시켰는데 아래쪽에 용두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다. 이와 같이 마루부에 용두가 새겨진 경우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지붕돌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는 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원래는 여러 부재들이 결구되어 상당히 고준하고 장엄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대석은 상면에 단판 16엽의 세련된 연화문을 장식하여 공양의 의미를 더하였다.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형의 별도 화형 문양을 장식하여 화려함이 돋보인다.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각면에 안상을 새긴 후 그 안에 운룡문(雲龍紋)과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사자상과 용문은 돋을새김이 강하여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으며 수호의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상하로 대칭되도록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상부에 높은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탑신석은 상대석 상면에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삽입·고정되도록 했으며,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둥은 중국에서 원나라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성행한 양식이었다.
탑신석 각 면에는 1구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부도에 대한 강한 수호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하부에 넓은 받침과 추녀와 사래가 번안되었으며, 처마부를 치켜 올려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마루부는 높게 돌출시켰는데 아래쪽에 용두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다. 이와 같이 마루부에 용두가 새겨진 경우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 한하여 나타나고 있다. 지붕돌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새겨져 상륜부를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는 일부 부재가 결실되어 원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원래는 여러 부재들이 결구되어 상당히 고준하고 장엄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지 북서쪽에 형성된 능선의 일정한 공간을 조성하여 장대석으로 기초를 견고하게 한 후 석등·상석·부도·탑비를 나란히 배치하였다. 중간에 1단의 석축을 두었으며, 여러 조형물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보아 왕릉의 석물 배치법과 유사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보각국사 혼수가 국사를 역임한 승려였으며, 태조 이성계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왕릉의 석물 배치에 준하는 배치법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부도는 1976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보각국사 혼수가 입적하자 문도들이 화장한 후 유골을 수습하였는데, 태조가 부도를 세울 것을 명하고 직접 시호와 탑호를 내렸다. 부도는 승려 입적 직후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1392년경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으며, 조선 건국 직후 건립된 부도로서 전환기의 부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부도의 양식이 왕실과 관련된 석조물들과도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 국왕이 파견한 석공에 의하여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과 함께 조선 초기의 부도 양식을 대표하는 작이다.
또한 부도의 양식이 왕실과 관련된 석조물들과도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 국왕이 파견한 석공에 의하여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과 함께 조선 초기의 부도 양식을 대표하는 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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