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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면 후미리 후미리석탑(蘇伊面 厚美里 厚美里石塔 )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소이면 후미리 후미리석탑(蘇伊面 厚美里 厚美里石塔 )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2. 7. 20:46

 

 

몇번이고 걸음을 한곳이다.

갈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매번 보임의 각도가 다르니 참 재미가 있다.

사진을 어찌 찍으면 더 좋을까? 하는생각에 누워도 보고....

그리 해봤자 그게 그거지만 말이다.

 

고향인 충주  다년오는 길 부담없이 만날수 있는 친한 친구같은 탑.

오늘도 겨울바람 부는 후미리들을 지나 다가가니 반갑다고 웃음을 준다.

언제나 찾아도 참 좋은 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뒤돌아 서는 발길에

후미리 석탑 긴그림자로 내 발길을 잡는다.

 

"언제 또 오시려나?" 

 

 

석탑주위로 있는 석부재들 다음에 가면 한번 자세히 보아야겠다.

 

석탑 상부는 일본인이 해체하여 가지고 가다 일부를 마을 입구(육각정이 세워진 후미리 965-1번지 일대) 개울에 버렸다고 하나 이곳은 경지 정리가 이루어져 지형이 크게 변한 상태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석탑의 지대석은 땅에 묻혀 있어 확인할 수 없으며 남아있는 석탑의 전체 높이는 약 2.4m이다. 기단부 주변에는 탑구로 추정되는 ‘ㄴ’자 형태의 판석 2매가 석탑 동쪽에 남아있다. 확인 가능한 크기는 각각 110×113×13㎝, 85×97×13㎝이다. 판석은 상면을 매끄럽게 치석하였으며, 끝 부분을 높이 3㎝ 정도로 한 단의 턱이 생기도록 치석하였다. 이는 탑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외부의 토사가 탑 쪽으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동쪽 판석 모서리에는 4.5㎝ 크기로 턱을 깎아내었는데, 이는 탑의 상부에서부터 흘러내려 모인 우수 등을 일정 방향으로 배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세월에 몸통 모두 내어주고 그래도 굳건히 자리지키고 있는 참 멋진탑.

탑이 있는 풍경이 참 좋다.

 

무어 감춘게 있나? 탑 내부도 꼼꼼히 한번 살펴보고.....

 

 

후미리 석탑을 바라보면 따뜻함이 있는것 같다.

슬퍼도 울지않는 어른같은 아이의 모습.

 

여기저기 자리 옮기며 사진을 찍어본다.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에 세운다. 후미리의 석탑도 절터의 중심에 세웠던 것으로, 원래는 5층이었으나 현재 1층만 남아 있다.고려전기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후미리 석탑이 있는 후미리 사지의 창건 시기나 연혁을 알려주는 고문헌 기록은 없다. 단지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후미리의 북방 약 600칸에 있음. 와편 다수 산재하며 훼양(毁壤)된 석탑은 하부 이층만 존재하는데 기부종횡각사척(基部縱橫各四尺)”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또한 “탑상골 절터”라는 지명을 사용하여 오래 전부터 탑이 있는 절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기단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었고, 각 판석의 크기는 남북면 약 146×90㎝, 서쪽면 약 117×90㎝이다. 동쪽면의 판석은 반파되었으며 남아있는 크기는 약 77×90㎝이다. 갑석은 각 변의 길이가 171㎝ 정도인 정방형의 판석 1매로 되어 있고, 상면에는 너비 102㎝, 높이 8㎝의 탑신괴임이 표현되어 있다. 1층 탑신석은 크기 85×85×76㎝로 각 면에는 너비 13.5㎝의 우주가 있다.

1층 옥개석은 전체 크기 135.5×57㎝이고, 옥개받침의 최하단부 너비 97㎝, 옥개석 상면의 너비 74㎝이다. 옥개받침은 3단이고, 옥개석은 낙수면의 경사도가 급하고 처마가 매우 짧은 형태이다. 옥개석 각 모서리에는 풍탁공이 남아있다. 석탑의 서쪽에는 크기 130×35×13㎝ 정도의 석탑재로 추정되는 장방형 석재 1매가 확인된다.

 

 

 

 

 

 

기조사된 기록에 의하면 조선말기 고종조에 풍덕군수를 지낸 안모씨가 묘를 쓰기 위하여 폐사시켰다는 전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석탑 이외에 두부가 결손된 석조여래입상이 있었으나 1978년경에 없어졌다고 하며 초석과 문확석 등이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노명식, 67세)의 전언에 의하면 석불은 과수원(후미리 1614-10번지) 한가운데 서 있었으며, 발부분은 묻혀 있었고, 지상에노출된 전체 높이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불상이 큰 돌에 붙어있었다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바위에 양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은 197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무렵 새마을 지도자들이 천렵을 왔다가 경운기에 싣고 갔다고 하며 주민들이 찾으려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사지에서 발췌]

 

한국의 사지의 글에서 새마을지도자들이 천렵을 왔다가 싣고갔다는 대목과 불상이 큰돌에 붙어있다는 대목에서 문득 지금 대장초등학교에 자리하고 있는 석불이 머리를 스친다.

새마을 지도자들이 천렵을 왔으면 그리 먼곳에서는 오지 않았고 경운기등을 몰고 왔다면 지근거리임이 분명할터 혹시나 하는 내생각이 후미리석탑과 대장초등학교 석불상을 한번 동일선상에 놓아본다.

 

[대장초등학교내에 있는 석불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