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탑동 곽원호,곽상조정려문(塔洞 郭元浩,郭相祚旌閭門)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탑동 곽원호,곽상조정려문(塔洞 郭元浩,郭相祚旌閭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2. 11. 07:03

 

 

곽원호는 조선시대의 효자입니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아버지는 곽진은(郭鎭殷)이며,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이다.  효자 곽진은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곽원호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대에 걸쳐 효행으로 정려(旌閭)된 효자 집안이다. 여덟 살 때에 묘소 아래 수리(數里)에 걸쳐 소나무와 참나무를 심으니 후에 숲을 이루고 울창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효심에서 한 일이었다.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하찮은 음식과 물건이라도 먼저 드렸다. 또한 부모가 병환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부모님에게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돌아가신 뒤로는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50년 동안 묘소를 지켰으며 90여 세에 여막에서 죽었다.  1852년(철종 3) 조정에 장계가 올라가 1854년에 정려(旌閭)되었다. 현재 상당구 탑동 251번지[탑동로 35]에 정려문이 남아 있다.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원호는 1854년(철종 5)에 효자로 명정되었다.

효자비는 높이 118cm, 폭 42cm, 두께 26cm의 비갈형이며 비신과 대석이 1매석으로 되어 있다.

정려 안쪽에는 1857년(철종 8) 송종수가 쓴 가선곽군원호정효기와 곽원호가 쓴 추모재서와 정문수호유서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 내에는 곽상조의 정려문은 있으나 효자비는 없고 곽상조는  곽원호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이다. 증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오위도총부부총관 곽상조는 1884년(고종 21)에 효자로 명정되었다.[문화재청]

 

효자현풍곽원호지문이라 쓰인 효자비가 있습니다

 

 

효자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현풍곽공원호지문(孝子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玄風郭公元浩之門)이라 쓰인 정려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곽원호의 조카인 곽상조의 정려현판입니다.효자증가선대부한성부좌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현풍곽공상조지문(孝子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玄風郭公相祚之門)이라 쓰인 정려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곽상조는 근대 개항기의 효자입니다.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영지(永之)이다. 곽상조의 아명은 백수(百壽) 이다. 현풍곽씨(玄風郭氏)를 포산곽씨(苞山郭氏)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곽형호(郭亨浩), 어머니는 교동인씨(喬桐印氏)이다. 큰아버지는 효자로 정려된 곽원호(郭元浩)이며, 할아버지는 곽진은(郭鎭殷), 증조할아버지는 곽여찬(郭汝贊)이다.

아들은 곽유엽(郭有燁), 곽진엽(郭晋燁), 곽최엽(郭最燁) 등 3형제를 두었는데, 곽유엽과 곽최엽은 무과에 급제하였다.곽상조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의 효행 사실을 구체적으로 상고하기가 어렵다. 다만 증조부 곽여찬, 할아버지 곽진은, 그리고 큰아버지 곽원호가 모두 효자로 정려된 집안의 인물이었음을 통하여 어려서부터 효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효를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884년 효자로 정려되어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左尹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에 증직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곽상조의 정려각은 따로 있지 않고 곽원호의 정려각 안에 정려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1884년 효자로 정려되었다 [郭相祚]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려 안쪽에는 1857년(철종 8) 송종수가 쓴 가선곽군원호정효기와 곽원호가 쓴 추모재서와 정문수호유서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