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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남계리 송인수신도비(文義面 南溪里 宋麟壽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문의면 남계리 송인수신도비(文義面 南溪里 宋麟壽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12. 12. 08:15

 

남계리는 문의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청주 신탄간 국도변과 청원 인터 체인지 도로변 마을로 동은 가덕면 국전리, 서는 도원리, 남은 미천리, 북은 화당리에 접해있다.
면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로 남쪽 작두산 북사면 산려지역에 발달한 마을로 북은 남일면과 남이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마을의 주된 부락은 원남계마을이며 동남쪽은 방죽골이 있고 방죽골(성북) 동남쪽에는 장자골(성남)이 있고 남서쪽에는 수여마을이 있다

 

송인수의 묘가 있는 마을은 화산(상지말)이라고 불리우며 원남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가 아름다워 부른 지명이다. 송씨의 묘소를 관리하는 부락으로 山支말을 말한다. 조선시대 참판을 지낸 송인수(宋離壽)의 묘가 있다.신도비는 묘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뒤 야트막한 송림이 우거진 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송인수의 묘와 함께 부인인 권박의 딸인 안동권씨의 묘가 나란히 있으며 송인수의 묘 뒤로는 송인수의 아들인 송응경부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인수 신도비(神道碑)는 조선 중종 때의 명신 이었던 송인수(1487∼1547)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묘소입구에 세운 것이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菴),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1522년(중종17)에 문과에 급제 홍문관정자(正字),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재직당시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제주목사로 좌천되고 다시 사수(泗水)로 귀양 갔다. 김안로가 제거되자 소환되어 예조참의, 승지, 형조참판을 역임한 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인종이 죽자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고향에서 수년간 지내다가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

비(碑)는 선생이 죽고 난 31년 후인 선조 11년(1578)에 세워졌으며 선생의 종제(從弟 )인 송기수(宋騏壽)가 지었으며 뒷면에는 종증손(從曾孫) 송시열(宋時烈)이 1669년에 지은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가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중기 신도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건립당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묘소도 조선시대 묘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문화재청]

 

 

송시열의 이름이 보입니다.
용의 조각이 섬세하며 참 힘이 있어 보입니다.
구름무늬의 모습이 실감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