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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동 낙가산 보살사중수비(龍岩洞 洛迦山 菩薩寺重修碑) 본문
낭랑한 목탁소리가 낙가산에 울려퍼진다.
수능일에 맞춰 기도하는 신도들과 스님의 염불소리가 보살사 경내를 낮게 흐른다.
부슬거리며 내리는 가는 빗줄기가 어깨위로 내려 앉는다.
그동안 발견되어 보살사 한쪽에 있던 보살사중수비가 제 자리를 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살사를 찾았습니다.
비록비두의 한쪽과 비신이 동강이 나있지만 나름 위엄있는 중수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용암동 보살사 보살사중수비(龍巖洞 菩薩寺 菩薩寺重修碑)
비신에 새겨진 글씨도 나름 선명하고 잘 읽을수가 있습니다.
菩薩寺重修碑 (篆題)
有明朝鮮國忠淸道淸州洛迦山菩薩寺重修碑銘幷 序
坡平 尹深 譔幷書
俗離一支西去至淸州治之東十里所而止者曰洛迦山其山巖峻崷崒自然秀異有刹曰菩薩寺盖刱自勝國至今爲佛法大興之地麗之恭愍王錫土田供香火費旣又降旨完護之無所與焉天順二年十二月又有 敎旨 國王下押署安寶以時考之盖在我 惠莊大王之世押雖不敢認而寶乃昭信之寶宜禪門世守爲寶而誇鄙衆刹也恭惟我 朝本以右文興化而僧道二敎亦甞傍設降 旨加恩事或有焉己卯名賢滿 朝明一統之義罷昭格署罷兩宗科則道流遂廢釋敎亦不振」凡寺刹土田臧穫各侵削耗散桑門之饌無復異時之盛而是寺亦凋弊旁落矣老僧瓊特者湖之燕歧人覺性大士號碧巖之高弟也始以敏幹選置南漢城摠攝八道僧敎領踐更僧副居守在城中凡幾年雉堞樓櫓寺舍多所繕完用其勞授卿階旣老歎曰歸乎歸乎吾乃緇流唯佛事是修顧棲棲城隍間老且死有愧初心矧茲階級又寧我有耶菩薩寺是吾從師受戒之所聞其闕狀己久盍歸而修之遂罄鉢橐之餘又勸諭甿俗舍施同志有妙仁者克左右之遠近聞師是役奔走輦負唯恐或後於是榱桷之朽折者新焉丹之澷漶者鮮焉齊宮香厨鐘磬鑪罐之屬百爾罔缺一復其舊四方來觀者咸一口頌功德嘖嘖焉佛者曰外誇精進不如中觧垢衣布施生福猶如▨箭射空初祖謂梁武帝廣建寺塔乃人天小果而幷無功德者實此意也信斯言也面壁足矣肖像立寺亦可廢也雖然天道至玄垂象始著圓覺雖捷悟入何從況魔强法弱衆生多障不有以張大之開導普濟之業又何因焉由此言之師之功終有不可泯者銘曰
靑山不騫碧水長流 法輪常轉有旺無休 曷爲無休載嗣其構 恒沙永昌配無量壽
崇禎紀元後五十六年癸亥六月立
보살사중수비 (전제)
조선국(朝鮮國)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 낙가산(洛迦山) 보살사(菩薩寺) 중수비명(重修碑銘)과 서(序)
파평(坡平) 윤심(尹深) 짓고 아울러 씀
속리산(俗離山)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가다 청주 치소(治所)의 동쪽 십리에 이르러 그친 곳에 낙가산(洛迦山)이 있다. 그 산은 바위가 높고 험하여 저절로 빼어나고 기이하다. 절이 있어 보살사(菩薩寺)라 이름하니 지난 고려 대에 창건되어 지금은 불법을 크게 일으키는 터전이 되었다. 고려의 공민왕(恭愍王, 1352~1374년)이 토지와 향화(香火) 공양을 올릴 비용을 하사하였고, 또 왕명을 내려 완벽하게 보호함이 더불어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천순(天順) 2년(세조 4, 1458년) 12월에 또 왕명을 내려 국왕이 문서를 내려 관청에서 보배를 안전하게 하라 하였는데 이때를 살펴보니 대개 우리 혜장대왕(惠莊大王, 세조) 때로서 왕의 문서임을 감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보배는 소신지보(昭信之寶)로서 마땅히 선문(禪門)에서 대대로 지켜 보배로 삼아 다른 보통 절에 자랑삼아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조에 들어 본래 문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켰는데 불교와 도교 2교 또한 일찍부터 나란히 설치되어 왕명을 내려 은혜를 받는 일이 간혹 있었다.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조정에 가득 찼을 때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뜻을 밝히고자 소격서(昭格署, 조선시대에 도교의 재초를 지내던 일을 맡던 관서)를 없애고 선교 양종 과거를 없애니 도교가 마침내 없어지고 불교도 또한 부진하게 되었다. 사찰의 토지와 노비는 각각 줄어들고 흩어졌으며 절 집안의 음식은 다시 이전의 성세가 없어서 이 절도 또한 조락하고 황폐해져 영락해졌다. 노승 경특(瓊特)이라는 이는 호서(湖西)의 연기인(燕歧人)으로 벽암(碧巖)대사 각성(覺性, 1575~1660년. 부휴의 제자로 임란 후 많은 절을 중창하고 남한산성을 쌓는 등 불사를 많이 한 고승)의 뛰어난 제자였다. 처음에 민첩하고 신체가 우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총섭(摠攝) 팔도승교령(八道僧敎領)에 선발되었다가 다시 승부(僧副)가 되었고 성에 머물러 지키기를 몇 년 동안이나 하여 성곽의 치첩(雉堞, 성벽)과 누각과 망루와 절 건물을 여럿 수선 보완하였다. 그 노고를 사서 벼슬과 직함을 받았으나 이미 늙어 탄식해 말하기를,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나는 승려로서 오직 불사만을 수행해야 하는데 돌아보니 성곽 사이에서만 살다가 늙어 죽게 되니 처음 마음먹은 것에 부끄럽구나. 하물며 이 단계에 있는데 또 어찌 아만이 있겠는가. 보살사(菩薩寺)는 내가 스승으로부터 계를 받은 곳이다. 듣자 하니 퇴락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하니 어찌 돌아가서 중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빈 발우와 전대 나머지를 가지고 속가의 농민들에게 보시를 희사하도록 권하고 이끄니 동지 묘인(妙仁)이란 자가 있어 곁에서 열심히 도왔다. 여기저기서 대사가 일을 벌인다는 말을 듣고 바삐 수레를 끌고 짐을 지고 와서 혹시 뒤지지나 않을까 걱정할 뿐이었다. 이에 서까래가 썩고 부러진 것을 새로 갈고 단청이 닳아 흐려진 것을 곱게 칠해 재궁(齋宮)과 향주(香廚)와 종과 향로와 주전자와 같은 것들이 모두 망가진 것을 하나같이 옛 모양대로 복구하니 사방에서 와 보고 모두 한 입으로 공덕을 칭송하여 시끄러울 정도였다. 불자가 말하기를 “밖으로 정진(精進)을 과시함은 도중에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는 것만 못하고, 보시로 복을 만드는 것은 마치 우러러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초조(初祖) 달마대사(達磨, ? ~ 535년. 인도에서 와서 중국에 처음 선종을 전한 초조(初祖). 처음 양나라에서 법을 펴다가 장강을 건너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련하여 선종을 엶)가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국 남조 양나라의 왕. 불교를 좋아하여 사원 건립과 불사 등을 크게 장려함)가 크게 절과 탑을 건립했으나 인천(人天)에 이룬 것이 적고 또 공덕도 없다고 한 것이 실로 이런 뜻이다. 이 말을 믿어라. 면벽 수련하면 충분하다.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우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 비록 천도(天道)가 지극히 현묘하여 모양을 드리워 비로소 드러나고 원만한 깨달음은 비록 빠르나 깨달은 경지에 들어가면 무엇을 따르겠는가. 하물며 마구니가 강하고 불법이 약하여 중생은 장애가 많아 크게 펼 수 없으니 열어 인도하고 널리 구제하는 일은 또 어떤 연유로 할 것인가.” 하였다. 이로부터 말하면 대사의 공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명에 이른다.
푸른 산은 이지러지지 않고 푸른 물은 길이 흘러
법륜이 항상 굴러 왕성하여 그침이 없네
어찌하여 그치지 않아 구성을 이어가는가
영원토록 길이 번창하여 무량수에 짝하리라
숭정기원후 56년 계해(숙종 9, 1683년) 6월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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