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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4/18 (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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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리사지에 있는 탑리석불을 살펴보고 있는데 주위에 동네분들이 계신다. 혹여나 또 다른 옛님이 있나 여쭤보니 동네주민분이 납작하고 길쭉한 돌이 있어 동네에서 빨래돌로 쓰던 돌이 있다고 하여 혹시나 석탑부재일까 하고 살펴보니 석탑부재는 아닌듯 한데 결구용으로 양옆을 깍아낸 치석재가 3개가 보인다. 지금은 길가에 경계석과 섞여 화단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무슨용도로 사용되던 자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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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은 태(胎)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명당자리를 고른 후 해당 예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그 시설물이 태실(胎室)이다. 나아가 왕실은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했다. 우리고장에는 진천군 진천읍의 김유신 태실, 충주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 태실, 청주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대왕 태실, 보은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대왕 태실,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 등 5개 태실이 존재한다. 왕명과 인명이 부여된 것에서 보듯 이들 태실은 주인이 모두 확인된다. 이에 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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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고인돌입니다. 청주시 남일면 황청리에 있던 고인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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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감는다 세월이라는 그늘속에 반쯤 몸을 기대고 오늘도 혼자 세월을 깁고 있다. 감각없는 생각은 아픔을 외면하고 혼자만의 것인양 자만(自慢)의 우산을 편다. 내 어린날의 아픔이 바람이 되어 겉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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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탑리를 찾았다. 지명에서도 알수 있듯이 동네에 탑이 있어 탑골 또는 탑리로 불리운다고 한다.지금이야 탑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그 당시의 탑리에 있던 절의 흔적을 전해주는것은 오롯히 앉아 밭한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탑리 비로불만 남아있다. 민초들의 서러움 또는 기쁨을 같이하며 자신의 모습 온전히 내주고 얼굴도 알수없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그 모습은 당당하다. 장대리에 있던 약사불도 같이 모셔 놓으니 두석불이 크기도 엇비슷하고 다정한 친구같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 창리 오창지구대 화단에 있던 장대리석불이 이곳으로 이전되였다. 장대리석불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장대리 석불은 훼손이 심하다. 손에 들고 있는 약합으로 보아 약사불이다.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청원 탑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