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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3 (3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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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인근 동네에서 나는 지경리 이발사 지씨 딸로 불리웠다. 참으로 없이 살던 그 시절 아버지는 어린나이에 이발소에서 이발기술을 배우셨다. 그리고 대처로 이 곳 저 곳 이발소를 전전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신 후 이 곳 지경리에 터를 잡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의 소원이셨던 이발소를 차리셨다. 남의 집을 얻어서 차린 이발소지만 아버지는 날아갈 듯 좋으셨다고 술 한잔 불콰하신 날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셨다. 작은 이발소에는 의자가 두개 있었다. 그리고 한쪽구석으로는 손님들의 머리를 감겨주던 하얀타일이 붙은 세면대가 있었다. 가끔씩 집앞에 국민학교가 끝나고 아버지 일하시는 이발소라도 들리면 하얀가운을 입으시고 손님들의 머리를 만져주시던 아버지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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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마을표지석이 서있는 이곳이 마을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나 보다.자립 자주 협동이라는 구호가 참 이채롭습니다.음성읍에 위치한 평곡석재에서 마을표지석을 기증한 모양입니다. 마을 표지석 전면에는 "자주.자립,협동하는 초천4리부락"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마을로 통하던 구길은 이제 추억만 남았고 커다란 새로운 표지석이 마을안내도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풋내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4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이다. 풋내는 초천4리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는 자연 마을로 양달말과 음달말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능골과 샛골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삼생리의 자연 마을인 무직이가 있고, 북쪽으로는 구맹지와 접하고 있다. 마을의 냇가에 풀이 많아서 풋내라 이름붙였는데, 예전부터 이 내[川]는 아무리 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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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었던 고려 후기의 미륵 석불. 유촌리 미륵불은 대석 없이 하단부가 지하에 묻혀 있으며, 머리 위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두정에는 나발을 표현하였으나 매우 작게 돋을새김을 하여 소발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분을 길고 뾰족하게 만들어 보관의 아랫면 홈에 맞닿아 있다. 상호는 길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이마의 윗부분이 상당히 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호는 살이 많이 찐 편이며 양 볼과 턱이 두툼하다. 턱은 둥글게 표현하여 마치 조선시대 문인석이나 장승을 보는 듯하며, 전체적인 인상의 표현이 문관석을 닮았다. 눈과 코가 손상을 입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목은 매우 짧아 거의 없는 편이며 어깨는 머리 부분에 비해 왜소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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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이 한창입니다. 개나리도 앞다투어 노오란 그리움을 토해내고 있구요. 주위로는 아침 저녁으로 날씨의 변화가 심하긴 해도 계절의 변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습니다.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 그치면 연초록의 나뭇잎들은 그 성숙도의 채색을 더 짙게 가져갈것이고 한뼘이고 더 큰 봄들의 기지개가 여기저기서 들릴것 같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도 보면서도 마음속은 항상 제자리이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아직도 조금은 치기어린 감정이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일까요? 앞다투어 알려주는 봄의 소식을 나도 마음속으로 느껴보고 싶습니다. 어린시절의 그리움 아쉬움의 꽃들도 피워 올리고 싶습니다. 봄비 내리는 오후 문득 마음속의 추억을 꺼내 봄도 나름의 호사가 아닐까요? 봄비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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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익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 148번지에서 김수홍(金壽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음성읍 초천리에 있는 백양서당(栢陽書堂)에 다니던 정문영, 정대영, 최만득 등과 음성 장날에 맞춰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에도 음성시장에서 시위를 하였다. 4월 6일 밤 산 위에서 약 5백여 명의 군중과 횃불을 들고 시위하다가 4명 모두 붙잡혔다. 이후 구속되어 징역 4개월 형을 받았다. 김영익은 서울에서 살다가 음성으로 내려왔으며, 60세에 사망하였다. 마을회관옆에 김영익추모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애국지사김영익선생의열추모비(愛國志士金榮翼先生義烈追慕碑)라고 적혀있습니다.추모비 옆에는 마을유래비도 어깨를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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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교된 덕생초등학교 정문앞에 서있는 장학비입니다. 일찌기 도일하여 자수성가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생활하던 중 덕생국민학교의 담장을 기공할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조움을 준 장진성의 노고와 학교사랑을 잊지않기 위해 장학비를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장공진성장학비(張公振性奬學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장진성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옆에 있는 최건옥장학비와 함께 1982년도에 세워졌다. 비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분은 삼생2리 태생으로 일찌기 도일 자수성가하여 영주차 귀국 본교에 담장을 기증하였기 그 노고 마음을 기리고자 이 장학비를 세우나이다. 1981년 11월 장학비건립추진위원회, 음성대일석배조각"이라고 장학비의 내용을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