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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주기적으로 호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서 호적제도를 실시해왔던 것으로 생각되며, 통일신라시대부터는 3년마다 호적을 다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가기구는 처음부터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으로부터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 수취할 필요가 있었다.그리하여 국가는 호를 단위로 하여 조세를 부과하고, 또 인구를 단위로 하여 역역을 부과하면서, 그 두 가지의 수취는 모두 호를 통해서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조세와 역역을 부과, 수취하기 위한 기초자료로서 국가는 호와 인구를 3년마다 파악하여 호적을 다시 만드는 제도를 일찍부터 발전시켰던 것이다.신라시대의 호적제도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는 3년마다 호적을 만들 때 호주가 일정한 양식에 따라서..
제석도는 불교의 신 가운데 최고신인 제석천(帝釋天)을 그린 불화이다. 제석은 천제석(天帝釋) 또는 석가데바인드라(釋迦提婆因陀羅, Sakro devanam Indrah)라고도 하며, 벼락을 신격화한 것이다. 벼락과 쇠갈고리, 인드라망을 무기로 하여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장악하며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신으로서,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아수라(阿修羅)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불교가 성립되면서부터 불교 속으로 수용된 제석은 도리천(忉利天)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여러 천중(天衆) 및 사천왕을 거느리고 호법(護法)·권선(勸善)·호세(護世)의 천신(天神)으로서 모든 신중의 으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제석신앙이 성행하여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제석..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홍가상의 영정.[개설]홍가상[1649~1740]의 호는 돈암(豚菴), 혹은 시산(詩山)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81년(숙종 7) 과거에 급제한 후 1708년(숙종 34)에 병조좌랑, 옥과현감(玉菓縣監), 대구판관을 거쳤다. 1726년(영조 2)에는 세자익위사어(世子翊衛司御)와 시강원(侍講院)을 겸하였고, 3년 뒤 1729년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또한 1729년에 80살이 넘게 되자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를 내렸다. 정성을 다해 국가에 봉사하고 외직에 나아가서는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형태 및 구성]「홍가상 영정」은 좌안상(左眼像)이며, 공수 자세로 견본채색(絹本彩色)이고, 관모는 ..
김이소는 조선 정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이고, 영의정 김창집의 증손이자 부사 김탄행(金坦行)의 아들이다. 병자호란 당시 충신의 후손들만을 위하여 시행된 충량정시(忠良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0년(영조 46) 홍문관교리를 거쳐 1776년에 대사간·강원도관찰사, 1778년(정조 2)에 도승지·대사성을 역임하고 예조·이조·형조·병조·호조판서를 지냈다. 1789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에 다녀와서 우의정이 되었고 1793년 사옹원도제조로 있다가 좌의정이 되었으며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 다시 청에 다녀온 그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정조임금은 채제공과 더불어 김이소를 꽤나 신임했었다. 신임이 두터웠던 김이소가 비록 한시적이었지만 삭탈관직(削奪官職..
강수(?~ 692?).신라 중기의 유학자, 문장가. 이름은 우두(牛頭).머리 뒷쪽의 뼈가 뿔처럼 솟아 있었다고 한다.글자 그대로, 소대가리.강수란 이름 역시 우두를 총애하던 무열왕이 머리뼈의 모양을 보고 '강수선생'이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 스스로 글을 깨우쳐 읽었으며, 당시 신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불교 대신 유학의 길을 택했다.신라 최초의 본격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신라의 외교 전반에 걸쳐 활약했다. 한반도 최초의 문장으로 출세한 유학자.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그들과 같이 6두품 출신으로 신분제도의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삼국이 통일된 뒤 외교적인 공을 인정받아 문무왕에게 받은 사찬(沙飡)의 관등이 최고였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