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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4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공산성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청주인 한정교의 불망비입니다. 비석의 정면에는 관찰사한상국정교영세불망비( 公山城 觀察使韓相國正敎永世不忘碑 )라고 각자 되어있습니다. 한정교(출생일1810년(순조 10)~사망일1875년(고종 12)는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돈칠(敦七). 한후유(韓後裕)의 증손이며 한용구(韓用龜)의 손자이고 한긍리(韓兢履)의 아들로 한경리(韓景履)에게 입양되었다. 1844년(헌종 10)에 증광별시문과(增廣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일찍이 고위 관직에 나아가 1845년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1849년에 당시 호조참판이던 한정교는 정사(正使) 이계조(李啓朝)를 수행하여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사행(使行)을 다녀왔다. 1851년(철종 2) 이조참판, 1854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이후 형조참판·예조..
공산성 선정비에 있는 여흥인 민치서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公山城 行判官閔侯致序淸白善政碑)라고 각자 되어있습니다. 민치서는 여흥인으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1866년 공주판관(公州判官), 1871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1880년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고, 1882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85년에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고, 1886년 2월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 1887(고종24)년 5월에는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민치서 [閔致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일기 2703책 (탈초본 128책) 고종 3년 6월 18일..
공산성 선정비군내에 자리하고 있는 평산인 관찰사 신 억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신공억영세불망비(觀察使申公檍永世不妄碑)라고 각자 되어 있습니다. 신 억은 평산인으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춘(景春)이다. 1864년(고종 1) 좌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조대비(趙大妃)에게, 치적이 뛰어나 수령직을 맡을 만한 인재 3인을 추천할 때 전 문천군수 신억도 함께 추천되었다. 곧 공충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부패한 향리의 숙정과 철저한 재결(災結) 조사를 통하여 선정을 하였다. 그 해 교리 강장환(姜長煥)이 영동군수의 부정을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 강장환은 유배되었으나, 신억은 외신(外臣)으로서 내신(內臣)의 처벌..
공산성 선정비군 중에 자리하고 있는 도순찰사김응근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도순찰사김공응근선정비(都巡察使金公應根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개석은 훼손 된 듯 합니다. 김응근은 1793(정조 1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경(溪卿), 호는 의석(宜石). 아버지는 참판 김명순(金明淳)이고, 형이 김홍근(金弘根)이며, 동생이 영의정 김흥근(金興根)이다. 1816년(순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82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그 뒤 외직으로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1857년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가 1860년 공조판서, 이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개인적인 능력보다는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판서직에까지 이르렀다. 글씨를..
공산성 선정비에 있는 여흥인 민치서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판관민후치서영세불망비(公山城 判官閔侯致序永世不忘碑)라고 각자 되어있습니다. 민치서는 여흥인으로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1864년 공주판관(公州判官), 1871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1880년에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고, 1882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885년에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가 되었고, 1886년 2월에는 공조판서가 되었다. 1887(고종24)년 5월에는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듬해에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민치서 [閔致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승정원일기 2682책 (탈초본 127책) 고종..
남일우(南一祐)는 조선후기 홍문관부제학, 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입니다. 본관은 의령(宜寧). 뒤에 남일우(南一愚)로 개명. 자는 백경(伯敬). 남태순(南太淳)의 손자이며, 나주목사 남병선(南秉善)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73년(고종 10) 성균관대사성, 1876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79년에는 그해의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뒤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8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충주·연풍·부여·청안 등지의 관청의 부실한 재정을 일제히 정비하였고, 조세제도를 정비함으로써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충청우도에 산재한 주사읍진(舟師邑鎭)의 수토군(搜討軍)과 수영(水營)의 난후군(欄後軍)을 혁파하여 군사제도를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