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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4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공산성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한산인 이겸재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이공겸재영세불망비(觀察使李公謙在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겸재는 1855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857년 여름 충청도 일대가 수해를 입자 이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857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서승보의 서계에 의하면 전감사 이겸재는 품행이 대쪽같고 아랫사람을 진실하게 대하여 형옥을 철저히 하여 허물이 없다는 평가가 있다. 1856년 공주향교의 중수를 주관하고 쓴 중수기현판이 전한다. 승정원일기 2572책 (탈초본 124책) 철종 6년 10월 29일 기미 10/13 기사 1855년 咸豊(淸/文宗) 5년 ○ 有政。 吏批, 判書洪鍾英進, 參判李明迪, 參議李 牌招不進。 以朴齊憲爲刑曹判書..
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는 19세기 전반기에 대홍수로 무너진 둑과 다리를 관민의 노력으로 재건한 후 이를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현재 제민천에는 총 25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민천교는 제일감리교회 부근에서 제민천을 가로 지르는 다리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상반교(常盤橋)라고도 불렀다.제민천교영세비의 비문에 의하면 1817년(순조 17) 대홍수로 제민천이 범람하여 다리가 끊어지고 가옥이 침수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무너진 다리를 수리하기 위해서 비용 3천여금이 필요하였는데, 공주의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리들은 이 같은 사실을 비변사에 보고하여 충청수영의 군자미 9백냥, 자체 조달 1천 2백 여량, 그리고 부여· 연기의 공전(公田)에 얻은 5백량을 합쳤다. ..
민치상은 1867년에 공충도관찰사가 되었다. 공산성 선정비군에는 민치상의 선정비가 3기 자리하고 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관찰사가 끝난 후 1870년 11월까지 감사로 있은 후 형조판서가 된다. 1870년 이후에 세웠을것으로 추측된다. 비석의 전면에는 도순찰사민공치상영세불망비(都巡察使閔公致庠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는 133*51*25정도입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2718책 (탈초본 128책) 고종 4년 9월 25일 을해 16/21 기사 1867년 同治(淸/穆宗) 6년公忠監司閔致庠所報..... 민치상은 1825(순조 25)∼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양(景養), 사호(賜號)는 하당(荷堂).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민유중(..
공산성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양주인 조득림의 영세불망비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조순상득림유애불망비(趙巡相得林遺愛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조득림은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입니다.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경(德卿). 조제만(趙濟晩)의 아들이다.1831년(순조 31) 진사로서 식년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헌종 3) 부교리를 지냈다. 그 뒤 영변부사를 거쳐 1846년 평안도암행어사 박영보(朴永甫)의 서계에 의하여 부사로서의 실정이 인정되어 치죄되었다.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에는 호군으로 종묘친제시(宗廟親祭時) 독옥책관(讀玉冊官)이 되었다. 1855년 형조판서·대호군이 되었고,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이듬..
공산성 선정비중에 하나로 1개의 석재에 이수를 조각한 형태로 비신이절단되여 파손된것을 붙여 놓았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숭정무자(1648년)이며 비신에는 목사박후병청간애민비(牧使朴侯炳淸簡愛民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박병(朴炳) 은 [1587년(선조 20)~1663년(현종 4) = 77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청주목사(淸州牧使)이다. 자는 소문(少文)이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증조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조부는 사재감(司宰監)정(正)박응천(朴應川)이다. 아버지는 사간(司諫)박동현(朴東賢)이며, 어머니 한씨(韓氏)는 한창서(韓昌緖)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난정으로 과거 볼 뜻을 접고 집에 들어앉아 독서를 하며 나날을 ..
조두순은 조선 후기의 문신. 조영극(趙榮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종철(趙宗喆)이고, 아버지는 조진익(趙鎭翼)이며, 어머니는 박종악(朴宗岳)의 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이 된 탐관오리로 유명한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이 그의 서조카이다. 즉 본 문서의 조두순은 조병갑의 백부이다. 본인이 특별히 악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생애를 보면 나름 능력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 1816년(순조 16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826년(순조 26년)에 황감제시(黃柑製試)에 장원 급제했다. 이어 같은 해 4월에 열린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대교로 선발되었다. 1849년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헌종실록 편찬을 주관했다. 1850년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지었으며, 병조판서가 되었다.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