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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4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민영상은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경(伊卿). 민이현(閔彛顯)의 증손이며 민정용(閔正鏞)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권제형(權躋亨)이다. 1872년(고종 9) 문과에 합격하였다. 1878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5년(고종 22) 8월에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886년 3월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1889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해 4월 예문관제학, 6월 한성부판윤을 차례로 역임하고, 7월에는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0년에는 홍문관제학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후 시강원좌빈객,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94년 7월에는 내무아문대신(內務衙門大臣)..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이다.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교리·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헌납·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사서·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공주 공산성 입구에 있는 선정비중에 하나인 목사 김효성의 선정비입니다. 목사김공효성청간선정무휼군졸비(牧使金公孝誠淸簡善政撫恤軍卒碑 )라는 기인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수와 비신이 일체형이며 조금은 투박하지만 비수의 문양이 아름답습니다. . 김효성(1585∼1665)은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할 때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길주에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 공주 ..
김시헌은 조선시대 동지춘추관사,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석(金錫)이고, 아버지는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며, 어머니는 윤개(尹漑)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
공산성 입구 선정비중에 하나입니다. 지금의 비석은 기존의 비가 훼손 또는 망실되어 새로 만들었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김공소거사비(觀察使金公素去思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김 소는 1602년(선조 3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이다. 증조부는 김석(金錫), 조부는 김인갑(金仁甲)이고, 부친은 김시열(金時說)이다. 외조부는 손녹경(孫祿慶)이고, 처부는 김안세(金安世)이다. 1630년(인조 8) 경오식년사마시(庚午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1635년(인조 13) 을해알성문과(乙亥謁聖文科)에 병과(丙科) 1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644년(인조 22)에 ..
공주 공산성입구에 서있는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조 충청관찰사를 지낸 김억령의 영세불망비 입니다.공산성 입구에 그동안 공주원근에 산재되어 있던 공적비등을 한군데로 모아서 세워 놓았습니다. 김억령의 비석은 훼손 또는 망실이 되어 새로 만들어 세워놓았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찰사김공억령영세불망비(觀察使金公億齡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김억령은 1529년(중종 24)~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중로(仲老)‧중구(仲耉)이다. 본관은 안동(安東[舊])이다. 증조부는 세조 때의 공신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참여한 김질(金礩)이고, 조부는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낸 김성동(金誠童)이며, 부친은 김언(金漹)이다. 외증조부는 세조의 문신이자 『衿陽雜錄(금양잡록)』의 저자인 강희맹(姜希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