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효자문
- 법주사
- 단지주혈
- 문의문화재단지
- 부여박물관
- 충주박물관
- 한독의약박물관
- 사과과수원
- 사인암
- 각연사
- 선돌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청풍문화재단지
- 화양구곡
- 상당산성
- 문경새재
- 화양동 암각자
- 공주박물관
- 보성오씨
- 효자각
- 밀양박씨
- 청주박물관
- 충북의 문화재
- 부도
- 곡산연씨
- 경주김씨
- 오블완
- 티스토리챌린지
- 공산성 선정비
- 국립청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전국방방곡곡/남원(南原) (5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좌영장배상규선정비(左營將裵尙珪善政碑): 1702년(숙종 28)에 남원부 진영에 속해 있던 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 일곱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웠다. 사각의 농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커다란 사각형의 둥근 봉우리에 무늬가 곁들인 지붕돌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61㎝×59㎝×24㎝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103㎝×74㎝이며, 지붕돌의 높이·폭·옆은 64㎝×88㎝×64㎝이다.지붕돌에 연화문의 무늬가 참 이채롭다. 청간애졸선정비(請簡愛卒善政碑)라는 비명도 눈에 띤다 아마 밑에 있는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사에 솔선수범 하지 않았나 합니다.
남원 광한루에 있는 비석입니다 남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군데로 모이 놓았습니다. 부사조병문선정비(府使趙秉文善政碑)이다. 조병문은 1858년(철종 9) 남원부사를 지냈다. 1875년(고종 12)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석의 총길이는 270㎝이다. 농대석 42㎝, 비신 140㎝, 지붕돌 88㎝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97㎝×64㎝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67㎝×49㎝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4㎝×20㎝이다.
민여임은 본관은 여흥, 자는 성지(聖之), 호는 취옹(醉翁), 진의(振衣)이다.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의 접반관이 되었다. 1599년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 예조정랑, 그 이듬해 병조정랑을 거쳐 장령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을 지내고,1614년(광해군 6) 남원부사, 1626년(인조 3) 공조참판을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사민여임선정비(府使閔汝任善政碑)비석의 총길이는 220㎝이다. 농대석 40㎝, 비신 130㎝, 지붕돌 5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137㎝×80㎝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130㎝×40㎝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1㎝×23㎝이다.
광한루 앞에는 자라모양을 한 자라돌이 있습니다. 한서에 ‘발해에 삼신산을 등지고 커다란 자라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연상해서 호수가운데 삼신산(영주, 봉래, 방장)을 선조 15년(서기 1579년)에 관찰사 송강 정철이 만든 뒤 이 고장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여기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신록 푸르던 날 다녀온 광한루 게으름이 너무 지나쳐 잊고 있었습니다. 광한루 정원에 있는 호석(虎石)입니다, 남원고을에 견두산에 들개떼가 살고 있었는데 들개떼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 고을에 안좋은 일이 생기므로 들개떼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지금의 호석을 견두산 방향으로 세우니 들개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