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곡산연씨
- 화양구곡
- 상당산성
- 법주사
- 각연사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공주박물관
- 한독의약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문의문화재단지
- 화양동 암각자
- 선돌
- 효자문
- 공산성 선정비
- 부도
- 보성오씨
- 티스토리챌린지
- 청풍문화재단지
- 충주박물관
- 경주김씨
- 사인암
- 사과과수원
- 오블완
- 충북의 문화재
- 단지주혈
- 부여박물관
- 효자각
- 문경새재
- 청주박물관
- 밀양박씨
- Today
- Total
목록전국방방곡곡/남원(南原) (5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현감남주헌선정비(縣監南周獻善政碑): 남주헌은 1815년(순조 15)에 남원부사를 지냈다. 1825년(순조 25)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남주헌은 조선후기 승지, 춘천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할아버지는 남공보(南公輔)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남인구(南麟耉)이며, 어머니는 윤상후(尹商厚)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 세마·호조좌랑·감찰을 거쳐 함양·무주·남원·임천 등의 수령을 역임하며 주로 외직을 맡아 치적을 남겼다. 특히 1808년(순조 8) 함양군수 재직시 암행어사에 의하여 치적이 보고되어 승서(陞敍)되고 이듬해 남원현감이 되어서는 진휼에 힘쓴 공으로 표창을 받았다. 1814년 정시 문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사간..
부사송수연불망비(府使宋守淵不忘碑) 비석의 총길이는 279㎝이다. 농대석 40㎝, 비신 160㎝, 지붕돌 79㎝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63㎝×75㎝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95㎝×32㎝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74㎝×22㎝이다. 정조 17년 4월 28일 경인 1793년 / 吏批의 관원현황 李趾馨爲貞陵令, 西部都事李在咸添書落點, 柳誼爲同義禁, 趙時淳爲羅州牧使, 宋守淵爲南原府使, 李喜大爲河東府使, 柳甲基爲豐川府使, 李廷書爲金山郡守, 李東野爲全州判官, 洪履祚爲濟州判官, 鄭宅冒爲固城郡守, 洪浩源爲求禮縣監, 金養根爲玄風縣監, 李敬心爲奉化縣監, 韓在中爲松蘿察訪, 李命基爲長水察訪, 李五鎭爲利仁察訪, 校書判校李顯采, 奉常僉正金洪運相換,...
현감홍집규선정비(縣監洪集圭善政碑) 앞면의 처음 나오는 세 글자가 마멸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남원과 관련된 사람 가운데 홍집규가 1811년(순조 11)에서 1813년(순조 13)까지 남원현감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홍집규가 어사를 지낸 적이 있어서 현감이라고 쓰지 않고 어사라고 썼다고 본다면, 이 비석은 1848년(헌종 14) 9월에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석의 총길이는 211㎝이다. 농대석 35㎝, 비신 146㎝, 지붕돌 3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59㎝×30㎝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86㎝×49㎝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7㎝×17㎝이다. 순조 11년 12월 23일 ○ 辛未十二月二十三日辰時, 上御涵仁亭。 下直守令入侍時, 右副承旨徐春輔, 假注書尹豐烈, 記注官朴思彦, 記事..
삼청이정사적비(三廳釐正事蹟碑): 남원부사 이식이 진상청·보민청·연호청 삼청의 문란을 바로잡은 공적을 새긴 사적비로 1748년(영조 24)에 세웠다. 비두에 새겨진 용문신이 이채롭다. 대리석 비신에 귀부와 이수로 되어 있는데, 귀부와 이수 조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면과 후면에 비문이 새겨 있다. 비석의 총길이는 340㎝이다. 비신의 높이 187㎝, 폭 60㎝, 두께 30㎝이다. 귀부의 길이 169㎝, 넓이 195㎝이다. 이수의 길이 81㎝이다.
『남원지』에 의하면 이상억은 1855년(철종 6) 남원부사로 재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부사이후상억사적비(府使李侯象億事蹟碑)화강암 비석으로 총길이는 215㎝이다. 비신의 높이 162㎝, 폭 65㎝, 두께 34㎝이다. 농대석 전면 가로 63㎝ 세로 78㎝, 지붕돌[가첨석]은 가로 157㎝, 세로 175㎝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철종 6년 5월 9일 경오 1855년에 義禁府啓曰, 南原府使李象億, 錦山郡守金在獻, 雲峯縣監趙存德, 珍山郡守嚴錫明, 咸悅縣監徐敬淳, 龍潭縣令李承沼, 益山郡守李恒翼, 高山縣監宋恪老等拿問嚴勘事, 傳旨啓下矣。 李象億·金在獻·嚴錫明·李承沼·李恒翼·宋恪老等俱在任所, 徐敬淳今方領運, 未及上來云, 依例發遣府羅將, 竝拿來, 趙存德亦在任所, 依例發遣府書吏, 差兼官後拿來, 何如? 傳曰..
부사박종대선정비(府使朴宗大善政碑) 박종대는 1818년 3월(순조 18)부터 1819년 5월까지 남원부사를 지냈다. ‘술이월일립(戌二月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826년 병술년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총길이 215m이다. 농대석 45㎝, 비신 120㎝, 지붕돌 50㎝이다. 농대석의 앞과 옆의 길이는 62㎝×52㎝이며, 지붕돌의 앞과 옆의 길이는 60㎝×40㎝이다. 비신의 넓이와 두께는 53㎝×16㎝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순조18년(1818) 有政。 吏批, 判書·參議未差, 參判洪羲臣進, 兼都承旨李存秀進。 啓曰, 判書·參議俱未差, 小臣獨政未安, 何以爲之? 敢稟。 傳曰, 仍爲之。 以趙琮鎭爲副應敎, 鄭基善爲校理, 金魯應爲同義禁, 李鍾遠爲刑曹正郞, 李源祚爲監察, 金學羲爲引儀, 李時翼爲禮賓直長, 李勉行爲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