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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국방방곡곡/남원(南原) (5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188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낙서, 호는 척재이다. 1793년(정조 17)과 1820년(순조 20) 두 차례 전라관찰사를 지냈으며 남원군 수지면 견두산 주변에서 잦은 재변이 일어나자 견두산을 제압하도록 호석을 남원부 중에 세워 재난을 막았다. 일설에 판소리 단가 「호남가」를 지어 전라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전라도민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이서구는 조선후기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문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직..
관찰사이돈상불망비(觀察使李敦相不忘碑) 이돈상은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공후(公厚). 이원응(李源膺)의 아들이다. 판관(判官)으로 있으면서 1864년(고종 1) 음직인 경과증광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바로 대사간에 중용되었으며, 1866년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일에 참여하여 근정문의 상량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1869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73년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방승지를, 그해 12월 동의금부사를 지냈다. 1876년 이조참판이 되었고, 그해 8월 전라감사에 제수되었다. 1880년 1월 전라감사 재임시의 공을 인정받아 정경(正卿)으로 승진 발탁되었으며, 그해 2월 공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감시복시(監試覆試)의 시관의 일로 인하여 전라도 고금도로 정..
부사송상인청백비(府使宋象仁淸白碑): 1629년(인조 7)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송상인은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조운을 감독하고 이어서 남원부사 등을 지냈다. 앞면에는 ‘부사송공상인청백비(府使宋公象仁淸白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숭정이년칠월일(崇禎二年七月日)’이라고 새겨 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인조 7년 4월 10일 을미 1629년 / 元振溟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政事。京畿都事元振溟, 咸鏡都事李慶恒, 平壤庶尹許稷, 刑曹正郞邊得一, 佐郞李愈, 南原府使宋象仁, 今加通政。保寧縣監崔振溟, 安城□□金守廉, 義城□□許洙, 礪山府使尹泂, 寶城郡守裵命純, 瑞山□□趙希進, 載寧郡守李昌業。
삼도토포사김시풍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 김시풍(1836~1894)은 조선 후기 무관이다. 자는 태화(泰華), 호는 추당(秋塘), 본명은 명기(明琦), 본관은 강진(康津)이다. 1871년(고종 8년)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이후 순천영장겸삼도토포사를 지냈고, 1894년 전주영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동학농민혁명에 가담 혐의로 홍계훈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남문시장에서 효수되었다. 이 비석은 18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부사김후영근영세불망비(府使金侯泳根永世不忘碑)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김영근은 헌종 5년 6월 29일 계사 1839년 남원부사의 관직을 제수받는다 竝擬, 何如? 傳曰, 允。 以成敎默爲禮賓主簿, 趙道林爲司宰直長, 金泳根爲南原府使, 吳顯甲爲金川郡守, 洪鍾浩爲海州判官, 華寧殿令單趙台淳, 朴永元爲工曹判書, 尹秉烈爲兵曹參判, 李景在爲同成均, 李觀熙爲舒川郡守, 李守文爲萬頃縣令。 吏批啓曰, 蔚山府使, 今當差出, 而本府以營下劇邑, 物衆地大, 素稱難治, 不可不擇差, 他道有聲績未準朔守令, 竝擬, 何如? 傳曰, 允。...
어사이면상불망비(御使李冕相不忘碑) 월두형 비석으로 농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57㎝×54㎝×16㎝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93㎝×49㎝이다. 어사로서의 이면상은 마지막 어사라는 점에 촛점이 맞춰져있다. 어사는 임시관직 일명 수의, 직지(直指)등 임금 직속으로 몰래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잘못을 살피고 백성의 사정을 조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암행어사는 각종 어사중의 하나이다. 다른 어사와는 달리 임명과 임무가 일체비밀인 것이 특색이다. 이 제도의 기원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헌부의 관원이나 임금의 측근자가 지방에 파견될 경우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관리하도록 남몰래 행동했는데 이들의 직책이 뒤의 암행어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록상으로 암행어사의 말이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