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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설따라 삼천리/마을표지석 (10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어지미는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옛 선인(先人)들이 앞들에 있는 못에서 고기를 낚구어 먹으니 고기 맛이 일품이었다. 이 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오다 고기 어(魚) 자에 못 지(池) 자, 맛 미(味)자를 써서 어지미(魚池味)라 칭하게 되었다. 약 60여호에 쌀과 고추 담배를 생산하고 있다. 옛 선인들이 마을 앞에서 고기를 낚아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 ‘어지미(魚池味)’라 하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어지미’는 본래 ‘어진미’가 아니었을까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진미’ 혹은 ‘어지미’는 어진 모습의 산’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이를 한자화한 지명이 인산(仁山)이다. 이곳에서는 어진 사람이 노는 산으로 해석하고 있다
청천면은 고구려시대 살매현이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청천현으로 개칭했다. 이후 고려 때는 청주목에 속하는 청천현으로 불렸다가 1413년 청천면이 되었다. 괴산군 중에서 가장 큰 면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면리(松面里)·덕평리(德坪里)·강평리(江坪里)·귀만리(龜灣里)·도원리(桃源里)·대티리(大恃里)·무릉리(武陵里)·삼락리(三樂里)·월문리(月門里)·지경리(地境里)·화양리(華陽里)·상신리(上新里) 등 21개의 법정리와 44개의 행정리를 관할한다. 남쪽은 경북 상주시 화북면(化北面)·보은군 산외면(山外面), 동쪽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농암면(籠岩面), 북쪽은 칠성면(七星面)·문광면(文光面), 서쪽은 청안면(淸安面), 남서쪽은 청원군 미원면(米院面)과 접한다. 면의 남동부에 소백산맥이 뻗어 있어 면..
문광면에 속한 신기리는 승주산 아래의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가나무정, 탑골 등이 있다. 가나무정은 가정이라고도 부르는 신기리의 원마을로 옛날 정자같은 가나무(노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탑골은 고려시대 절탑이 승주골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새로 터를 잡아 이룬 마을이라 하여 신기라는 명칭이 생겼다. 탑골마을은 신기2구에 속한다. 탑골이라는 명칭은 동네에 위치한 삼층석탑에서 유래되었다. 석탑은 도난당하였으며 몸돌 하나를 이용하여 다시 탑을 세워 놓았다.
예전에는 마을표지석이 서있는 이곳이 마을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나 보다.자립 자주 협동이라는 구호가 참 이채롭습니다.음성읍에 위치한 평곡석재에서 마을표지석을 기증한 모양입니다. 마을 표지석 전면에는 "자주.자립,협동하는 초천4리부락"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마을로 통하던 구길은 이제 추억만 남았고 커다란 새로운 표지석이 마을안내도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풋내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4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이다. 풋내는 초천4리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는 자연 마을로 양달말과 음달말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능골과 샛골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삼생리의 자연 마을인 무직이가 있고, 북쪽으로는 구맹지와 접하고 있다. 마을의 냇가에 풀이 많아서 풋내라 이름붙였는데, 예전부터 이 내[川]는 아무리 가물..
연정리는 면의 남동단에 있는 마을로 동은 남이면 상발리, 서는 궁현리, 남은 남이면 구미리, 북은 청주시 동막동에 접해있다.연정리는 본래 청주군 서강내 이상면의 지역으로써 개울물이 여러곳에서 와서 이 곳에서 합쳤다고 하여 오계리라 하였는데 조선조 명종 때 효자 幕溪公 趙鋼이 이곳에 터를 잡고 정자나무를 심고 마을 복판에 못을 파고, 마을 이름을 연정이라 하였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西江內 二下面 이교리 일부를 편입하여 연정이라 해서 江內面에 편입되었고, 큰말과 흔뜸을 1리로 하고 윗뜸과 재너머를 리구로 분구하였다. 자연마을로는 큰말-연정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윗말-연정리 동쪽에 있는 마을. 혼뜸-큰말에서 서남쪽에 있는 마을.집너머-큰말에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솔고개(松峴)윗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