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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중원의 향기 (82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신니면장 윤우영의 공덕을 기리는 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불망비의 음기를 통하여 면에 부임하면서부터 주민이 원하는 바를 수행하고, 공정한 업무와 함께 적은 봉급에도 주민들의 구휼에 힘을 기울이고, 어른들에게 예를 갖추어 봉양한 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도 3호선 구 도로를 이용하여 신니면사무소를 지나 용원저수지 매점 뒤에 있었으나 지금은 200여미터 위에 있는 송암공원 한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좌원수 형태로 화강암으로 제작하였다. 비의 크기는 35.5×14×104.5㎝이다. 비제는 8×7㎝의 해서체로 ‘신니면장윤우영송덕불망비(薪尼面長尹宇榮頌德不忘碑)’라 하였고, 앞면에는 3×3㎝의 해서체로 양옆으로 2행 4구씩..
봉방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방과 하방의 ‘방’자와 봉계동의 ‘봉’자를 합쳐 봉방동(鳳方洞)이라 하였다.본래 충주군 북변면 지역으로 영조 때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보면 북변면 7개 리 중에 방정동리(方井洞里)가 현재의 봉방동 지역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마을 이름은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서 확인된다. 이곳에 보면 봉계와 상하방이 나온다. 봉계와 상하방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주면 봉방리가 되었고, 금대, 신촌, 칠지, 대가미 일부 지역이 봉방리에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봉방리는 충주천 남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마을이 되었다. 1931년 충주면이 충주읍으로 승격되었고,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었다. 봉방리는 봉방리1구와 봉방리2구로..
반선재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충북 충주시 문화동 755-1소재합니다.충주 무학시장과 가까이 있습니다. 이용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이지만 언제든지 볼수는 있습니다.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주차장은 공용주차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반선재를 관람후 무학시장내에 있는 순대골목,만두골목에 들려 식사를 해도 참 좋습니다. 인 반선재는 반기문 전(前) 유엔 사무총장이 학창시절을 지낸 곳이라고 합니다.반기문 총장이 20여 년을 살았던 본가로 지붕에 기와를 얹은 ㄱ자형의 집으로 2013년 8월 복원작업을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반선재라는 이름이 일반 시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반기문 옛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반선재 한구석에 반기문총장의 입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일..
의림사지는 1989년 충주 대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명문이 새겨진 청동반자가 출토되면서 사명이 확인되었다. 의림사는 청동반자에 새겨진 “~禪義林寺~大定三十年~” 등의 명문으로 볼 때 1190년(고려 명종 20)경 선종계열의 사찰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 기록에서는 사찰의 창건이나 폐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大鑑國師 坦然(1070~1159)의 「斷俗寺大鑑 國師碑」에서 사명이 확인된다. 이 비문에는 탄연이 1104 년(고려 숙종 9)에 대선승과에 합격하여 왕명에 의해 의림사에 주석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청동 반자의 명문과 비문을 통해서 볼 때 의림사는 12세기 초 에서 12세기 말까지 사세가 이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해 조선시대 문헌에 서..
2002년 원주원씨충주종친회에서 대소원면 완오리 원주원씨충주종중묘지의 입구에 세운 강릉인 효절부 김용근여사의 추모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효절부강릉김용근여사추모비(孝節婦江陵金龍根女史追慕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김여사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사의 성은 강릉김씨이며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446번지에서 아버지 김노경씨와 어머니 유씨의 4녀중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착한 천성에 효심이 지극한 딸로 방년에 충주시 금가면 매화리 하시부락에 거주하는 원주원씨시중공파계 음성공후 사직공파 26세손 용팔과 결혼하여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부군 잘 섬기며 아들형제와 딸하나를 출산하여 다복한 가정생활을 하던 중 아...슬프도다 부군이 우연히 병을 얻어 10여년간 ..
이시희와 이시걸은 아버지의 중환에 잉어가 약이 된다고 하여 구하려고 했지만, 겨울철이라 못이 얼어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형제가 얼음 위에서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자 잉어가 솟아나왔다. 어느 땐가 약을 구하기 위해 형제가 밤길을 나서자 호랑이가 나타나 지켜 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이시희와 이시걸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3년간이나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을 얻자 대소변을 맛보며 간호를 했고, 돌아가신 뒤에는 죽을 먹으며 시묘를 하는데, 형제간에 서로 묘소를 지키며 효를 다했다. 1722년(경종 2) 정려되었으며, 1756년(영조32) 형 이시희는 통정대부승정원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아우 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