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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계원리는 면 최남동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서의 삼면은 보은군 산외면 원평리와 대원리, 북은 어암리에 접해 있고 청주시의 최동단에 위치하는 마을이다.청주군 산내이상면의 지역으로 조선영조 후반(1750-1776)에는 후운정리와 계당리만이 있었으나 정조 22년(1789)경에 상두원리, 내기리, 내기동리가 새로이 조성되었으나 헌종대(1845년경)에는 상두원리가 두원으로 변경되어 두원리, 후운정리, 계당리로 통폐합되었고 고종대(1871년경)에 후운정이 후운리로 바뀌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두원리, 후운동, 계당리, 내기동으로 되어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계당리와 두원리의 이름을 따서 계원리라 하여 미원면에 편입되었음. 자연부락으로 훈운정, 지당, 두원리, 안터, 채목이부락이 있음 자연마을..

조선 후기 철종 때 한 나그네가 걸어서 한양을 가고 있었다. 청원의 쌀안[米院]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부지런히 걸어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청주성 남문 밖 합수머리에 당도하였다. 개울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신을 벗고 발을 담갔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발을 물에 담근 채 괴나리봇짐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새소리에 놀라 잠이 깨니 해가 서쪽 하늘에 걸려 있고, 까마귀 떼가 벌겋게 물든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언짢은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머리를 흔든 뒤에 물속에서 발을 빼려고 물속을 보았다. 물에 잠긴 두 발은 곱고 하얀 모래가 덮여 있는데, 발밑 패인 곳에 거친 황금색 왕모래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게 금이 아..

미원면 수산리에 있는 남양홍씨의 사당입니다. 남양홍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洪殷悅)이며, 중시조는 13세손인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이다. 입향조는 20세손 홍해(洪瀣)로서 기묘사화(1519)때 선대가 화를 입자 피신하다가 1535년경 청원군 미원면 너더리에 정착하면서 세거지가 되었으며, ‘너더리’란 널판의 다리가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너더리홍씨로 통용되었다고 전한다. 집성촌은 미원리, 수산리, 용곡리, 화원리 등에 200여 호가 살고 있었으며 후손은 수산리에 남양사(南陽祠)를 세우고 시조와 선조들을 봉향하고 있다.

문의문화재단지 영조대왕태함(文義文化財團地 英祖大王胎函) (tistory.com) 문의문화재단지 영조대왕태함(文義文化財團地 英祖大王胎函) 문의문화재 단지내 유물전시관 입구에 있는 영조대왕의 태실함이다. 영조대왕의 태실비는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에 위치하고 있다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영조대왕 태실비] king6113.tistory.com 현암에서 채석했고 연 5천여명 동원, 영조태실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현암에서 채석했고 연 5천여명 동원, 영조태실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 www.inews365.com

무성리는 청주군 산내이하면 지역으로 조선영조 후반(1750-1776)에는 태봉리로 불리었 는데 정조 22년(1769년경) 태봉산정리로 개칭 되었다가 헌종때 다시 태봉리로 환원 되 었다. 1910년 경술국치직전에는 태상 태중 쌍천 추곡 지산리로 이루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지산리의 일부를 지산으로 넘겨주고 랑성면에 편입되어 1947년 음지 말(추곡)을 2리로 분구 하였다. 태봉마을(胎上) 은 태봉산 밑에있는 마을이며, 마을앞에 배가 들어오는 형국의 마을이라고도 하며 영조대왕 태실이 있는 산아래 마을을 칭합니다. 영조대왕 태실은 이 곳 태봉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조대왕 태실비석은 영조대왕 태실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왕자아기씨태실이라고 적혀있으며 옆에는 비석을 세운 날자가 각인되어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