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효자문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상당산성
- 부도
- 각연사
- 선돌
- 밀양박씨
- 충주박물관
- 한독의약박물관
- 사과과수원
- 화양동 암각자
- 사인암
- 곡산연씨
- 티스토리챌린지
- 공산성 선정비
- 단지주혈
- 보성오씨
- 국립청주박물관
- 법주사
- 공주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 충북의 문화재
- 문경새재
- 오블완
- 문의문화재단지
- 경주김씨
- 청주박물관
- 부여박물관
- 화양구곡
- 효자각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왜 보지 못했을까?몇 번이고 다닌 길이지만 이상스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길가에 자리잡고 있는 비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뭔가 딴 생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문의현령과 군수를 지낸 영세불망비 4기와 경주김씨 문중에 시헤비가 1기 자리하고 있다.서로가 다른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한 곳으로 모아 놓은것 같다. 이위재(李渭在)는 승정원 일기를 살펴보면 1866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시작으로 남평현감(南平縣監)등을 역임하고 고종12년(1875년)문의현령으로 제수된다.문의현령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75~1877년까지 문의현령을 지내게 된다. 아마 선정비는 1877년 이후 세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有政。 吏批, 判書金在顯·參判尹滋承進, 參議未差, 承旨缺, 以閔奎鎬爲內閣提學,..
군수서후병익청간선정비(郡守徐侯丙益淸簡善政碑)라고 음기되여 있다.비석의 상태는 다른 비석에 비해 양호하다. 비석은 문의면 두모리에 위치하고 있다.원래 두모리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도로확장때 공터인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비석의 관리가 어려워 문의문화재단지내로 이전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석을 바라보며 왼쪽에서 두번째 자리하고 있는 비석이다. 승정원일기 고종39년 임인(1902년 광무6)서병익을 문의 군수에 임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前郡守徐雨益任文義郡守...이라는 대목에 서우익(徐雨益)이 서병익(徐丙益)의 오기(誤記)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서병익은 고종43년 2월14일 신해년 1906년에 문의군수(文義郡守)였던 서병익을 신창군수(新昌郡守)로 임명하는 대목이 나온..
비석의 전면에는 김공원근구제불망비(金公元根救濟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소화5년(1930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청원군 남일면 두산리 소전이 마을(25번국도변) 고개마루에 세워져있습니다. 김원근의 구제를 기리기 위하여 청주군 남일,가덕면십이동립(淸州郡 南..
행정리에서 삼항리로 너머가는 고갯길에 자리하고 있는 삼항리 입석이다. 삼항리 선돌은 지금도 동네주민들의 신앙대상이 되고 있는지 금줄과 소지를 두르고 있다. 선돌옆에 있는 노목과 길건너 있는 노목까지 새끼줄로 만든 금줄을 두르고 있다.선돌옆에는 예전 조선조 문의현령을 지낸 현령공덕비가 2기 자리하고있다. 선돌은 길쭉한 자연석 또는 일부만을 가공한 기둥모양의 돌을 땅 위에 하나 또는 몇 개를 똑바로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분포 범위는 거의 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넓은 분포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구조와 대부분 단독으로 세워지는 유적으로서의 취약성 때문에 이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
조선후기의 학자인 주일재 윤승임의 신도비이다. 신도비 뒤로 있는 사당인 숭현사는 조선 숙종 42년(1717)에 괴산군수(傀山郡守)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 주일재(主一齋) 윤승임(尹昇任, 1583∼1688), 옥계(玉溪) 박곤원(朴坤元, 1477∼1607), 사헌집의(司憲執義) 만둔암(晩遯庵) 윤사석(尹師晳)의 위패를 봉안하고 세운 사당이다. 고종 8년(1871)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89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반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양회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숭현사(崇賢祠)"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마당 앞에 "옥화서원(玉花書院)" 편액을 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