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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광한루 (1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양재영 남원면장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광한루원을 보수하였다. 면장양공재영시혜비(面長梁公裁英施惠碑)라고 적혀있다.
이용준영세불망비(李容準永世不忘碑): 1938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용준은 1879년(고종 16)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추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월랑을 건립한 부사이다.
북시장개창비(北市場開創碑) 이 비석은 남원 북시장을 개창한 내용의 비를 세웠는데 이 비가 퇴락하여 없어지자 다시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남원 북시장은 현재 남원의료원이 있는 자리로 1900년 이태정(李台挺) 군수가 열었다고 한다. 북시장개창비(北市場開創碑)다. 비문 내용은 이렇다. “군수 이태정과 이덕홍이 지난 경자년 북쪽 터(北場)에 저자거리를 열었다. 한량 이익권·양상준이 사적비를 만들어 마침내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비가) 퇴락하자 노수향·정태원이 후손들과 함께 옮겨 세웠다. 이병근·박갑수가 이것을 보고서 잊지 않았다. 남원부민들이 위안을 삼고 기뻐하였는데 이 뜻이 널리 퍼져 나아갔다. 1924년 9월에 세우다.” ) --> 이태정은 고종 36년에 남원군수로 부임하여 1년간 재임하였다. 19..
관찰사이돈상불망비(觀察使李敦相不忘碑) 이돈상은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공후(公厚). 이원응(李源膺)의 아들이다. 판관(判官)으로 있으면서 1864년(고종 1) 음직인 경과증광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바로 대사간에 중용되었으며, 1866년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일에 참여하여 근정문의 상량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1869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1873년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방승지를, 그해 12월 동의금부사를 지냈다. 1876년 이조참판이 되었고, 그해 8월 전라감사에 제수되었다. 1880년 1월 전라감사 재임시의 공을 인정받아 정경(正卿)으로 승진 발탁되었으며, 그해 2월 공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감시복시(監試覆試)의 시관의 일로 인하여 전라도 고금도로 정..
부사김후영근영세불망비(府使金侯泳根永世不忘碑)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김영근은 헌종 5년 6월 29일 계사 1839년 남원부사의 관직을 제수받는다 竝擬, 何如? 傳曰, 允。 以成敎默爲禮賓主簿, 趙道林爲司宰直長, 金泳根爲南原府使, 吳顯甲爲金川郡守, 洪鍾浩爲海州判官, 華寧殿令單趙台淳, 朴永元爲工曹判書, 尹秉烈爲兵曹參判, 李景在爲同成均, 李觀熙爲舒川郡守, 李守文爲萬頃縣令。 吏批啓曰, 蔚山府使, 今當差出, 而本府以營下劇邑, 物衆地大, 素稱難治, 不可不擇差, 他道有聲績未準朔守令, 竝擬, 何如? 傳曰, 允。...
어사이면상불망비(御使李冕相不忘碑) 월두형 비석으로 농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폭·옆은 157㎝×54㎝×16㎝이다. 농대석의 폭과 옆은 93㎝×49㎝이다. 어사로서의 이면상은 마지막 어사라는 점에 촛점이 맞춰져있다. 어사는 임시관직 일명 수의, 직지(直指)등 임금 직속으로 몰래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잘못을 살피고 백성의 사정을 조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암행어사는 각종 어사중의 하나이다. 다른 어사와는 달리 임명과 임무가 일체비밀인 것이 특색이다. 이 제도의 기원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헌부의 관원이나 임금의 측근자가 지방에 파견될 경우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관리하도록 남몰래 행동했는데 이들의 직책이 뒤의 암행어사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록상으로 암행어사의 말이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