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단지주혈
- 경주김씨
- 문의문화재단지
- 효자문
- 청풍문화재단지
- 선돌
- 화양동 암각자
- 보성오씨
- 한독의약박물관
- 오블완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충북의 문화재
- 공산성 선정비
- 사인암
- 티스토리챌린지
- 화양구곡
- 청주박물관
- 사과과수원
- 상당산성
- 부도
- 각연사
- 공주박물관
- 곡산연씨
- 충주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효자각
- 법주사
- 문경새재
- 밀양박씨
- 부여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안동권씨 (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양정공 사우는 충주시 금릉동 능암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사당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식의 형성되면서 존조경종(尊祖敬宗)이 강화되어 사당을 건립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양정공 사우 역시 이러한 사당에 해당된다. 조선 중기 안동권씨 후손들이 조선 세조 때의 무신인 양..
소이면 갑산2리 동녘마을에 봉안된 조선초기 문신인 권제의 사묘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권제는 1387(우왕 13)∼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검교시중(檢..
광서16년(고종27년 1890년)병조에서 권영수에게 내린 임명장이다. 교첩이라 함은 조선시대에 5품 이하의 문무관원을 임명할 때 내리던 사령장(辭令狀 : 告身)을 말한다.5품 이하는 낭계(郎階)라 하며,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친 뒤 왕명을 받아 이조 또는 병조에서 발령하였다.연호 위에 찍는 도장[印]은 ‘이조지인(吏曹之印)’ 또는 ‘병조지인’이다.교첩의 서압(署押 : 도장 대신 글씨로 자신을 표시하는 행위)은 참의 이상의 당상관에서 1인과 정랑·좌랑 중 1인 두 사람만이 하게 된다.교첩도 교지와 마찬가지로 그 가문의 사환(仕宦)을 입증하는 자료이므로 소중히 보관해왔기 때문에 조선 초기 및 전기의 것이 비교적 많이 전래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관료정치 및 양반사회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왕이 권종석장군에게 내린 유서이다.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광서 16년이면 고종27년 경인년 (1890년)에 내린 유서이다. 권종석은 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본관은 안동. 자는 주백(周伯), 호는 만오(晩悟). 아버지는 권교삼(權敎三)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서 1848년(헌종 14)에 출생하였으며 여덟 살 때 부모를 잃었다. 1863년(철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비변랑이 되었고, 1881년(고종 18) 의정부공사관이 되었으며 1883년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1884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에 동료 4명과 함께 왕을 호종하여 13일간 옷도 벗지 아니하고 왕의 신변을 보호하였다.1885년(고종 22) 포도청종사관, 1886년 훈련원주부, ..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 권국화의 정려문이다. 권국화에 대한 기록으로는 『순조실록(純祖實錄)』에 1831년(순조 31) “유생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증직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무신년(1728) 당시 집에 역도가 난입하..
조선 중기의 학자. 스승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청주에 세웠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안동. 서울 출생. 자 치도(致道). 호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시호 문순(文純). 1660년(현종 1) 19세로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1659년(효종 10)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덕원부(德源府)에 유배되고, 남인(南人)들이 득세하자, 청풍(淸風)의 산중에서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모아 유학을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