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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호암지 (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주수리조합은 1922년 4월 1일 설립 인가를 받고, 동년 9월 13일부터 충주군 충주면 지역에 관개 시설 공사를 착공하여 1924년 3월 31일 준공하였다. 최초 몽리 면적은 394정보였으나 1931년 기록에는 510정보로 증가하였으며, 이 면적은 그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조합장은 영목정일(鈴木政一)이 맡았고, 1929년 최지환으로 교체되었다가 1931년 다시 영목정일(鈴木政一)로 교체되었다. 1935년에는 굴정좌전차(堀井左傳次)가 맡았다가, 1939년 중천룡장(中川龍藏)으로 교체되었다. 충주수리조합은 몽리 구역 내의 토지에 대해서 과도한 수리조합비를 징수하고 농사 개량을 명분으로 농민들에게 판매 비료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1931년 수리조합비는 1등지의 경우 단보 당 7원 32..
국민학교시절 소풍을 간다고 하면 탄금대 아니면 호암지였다. 물통을 메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먼지나는 신작로길을 걸어서 탄금대를 가곤했다 호암지 가는 길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어린시절에는 친구들과의 장난도 그렇고 멀리 가는 것이 좋아 탄금대를 선호했었다. 오랫만..
호암지 축조사업성공기념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충주수리조합장영목정일씨사업성공기념비( 忠州水利組合長鈴木政一氏事業成功記念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의 뒷면에는 축조성공기념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 비의 건립시기는 소화8년(1933년)이라고 적혀있다. 호암지의 건립 경위에 대해..
호암지의 건립 경위에 대해서는 현재 호암지 나룻터(일명 뱃집)에 있는 일본인 충주수리조합장 스즈끼 세이찌가 쓴 사업성공기념비 비문이 전부이다. 호암지는 스즈끼 세이찌가 충주면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1922년 공사를 착공하여 1923년 3월에 준공하였다. 호암지 개발의 주된 목적은 천수답 성격을 띤 모시래들(일명 달천평야 또는 충주평야)을 곡창지대를 조성하여,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할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암지는 어릴적 나의 놀이터라고 표현하면 좋을것이다. 여름이면 호암지에서 수영도 하고 겨울이면 호암지 얼음위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곤 했다. 국민학교 시절 소풍놀이를 가는 곳으로 호암지와 탄금대가 서로 경쟁(?)도 했었다. 지금은 사라진 보트를 타는 연인들의 모습이 참 좋았던 호암지.지금은..
호암지는 스즈끼 세이찌가 충주면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1922년 공사를 착공하여 1932년 3월에 준공하였다. 호암지 개발의 주된 목적은 천수답 성격을 띤 모시래들(일명 달천평야 또는 충주평야)을 곡창지대를 조성하여,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할 식량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