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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면 잠병리 충흥사(金加面 岑屛里 忠興祠) 본문
금가면 잠병리 축동에 위치하고 있는 순흥안씨의 재실이다.
찾는날은 돌보는 이 없이 쇠락하여 재실의 마당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고 대문의 문짝도 떨어져 있고 관리가 되질 않고 있었다. 충흥사라는 이름의 석판과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스테인철재대문이 낮설어 보였다
잠병리(岑屛里)는 본래 충주군 가차산면 지역으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명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잠리, 사천리, 사랑리, 하담리와 상잠리 일부를 병합하여 잠병리가 되었다. 법정리인 잠병리는 3개의 행정동(축동·금병·초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은 축동(일명 싸리골)과 금병이다.
잠병리가 공식 행정구역 명칭이 된 것은 1914년부터지만 잠병리란 이름은 이미 예전부터 사용되던 이름이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82호에 남자 205명, 여자 33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보다 20년 뒤인 1780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충주목 가차산면조」는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89호에 남자 266명, 여자 17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70년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충주목 방리조」에도 잠병리는 관문에서 북쪽 20리에 있고 269호에 남자 394명, 여자 422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흥사(忠興祠)는 순흥인 안경창(安景昌)을 배향하고 있다.충흥사는 음력 10월 8일 제사를 지내고, 시제는 10월 10일에 지낸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 보아서는 제사의 향불도 꺼진지 오래된 듯 세월속에 쇠락되여 가고 있다. 동네에는 안명원(安命遠) 묘, 안복원(安福遠) 묘가 있다. 안명원 묘와 안복원 묘 앞에는 한 그루 향나무가 있는데 안명원과 안복원이 중국에 다녀 올 때 사용했다가 땅에 꽃아 둔 지팡이가 자라서 향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순흥안씨 잠병리 집성촌은 순흥안씨 17세손으로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안경창(安景昌)이 1600년경 경기도 양주에서 현 충주 금가면 잠병리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했다. 안경창의 세 아들 중 안명원(安命遠)의 후손이 잠병리 금병에 주로 세거하고, 안복원(安福遠)의 후손은 주로 잠병리 축동에 세거하고 있다.
금가면 잠병리 충흥사(金加面 岑屛里 忠興祠)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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