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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만동묘중수기(淸州博物館 萬東廟重修記) 본문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는 화양동에 소재한 먄동묘를 중수할때 새겨놓은 만동묘 중수기입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이다.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禮)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老論)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복구되어 있고 만동묘정비가 지방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동묘[萬東廟] (두산백과)
2013년 12월 11일 뉴시스 충북신문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청주=뉴시스】김기준 기자 =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은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탄생일(음력 11월 12일)을 맞아 올해 새로 입수한 '만동묘 중수기 현판'을 12일부터 22일까지 이 박물관 성설 전시장에서 특별 공개한다.
이 현판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만동묘를 중수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로 123cm, 세로 80cm 크기로 6개의 판자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테두리에 틀을 대어 현판의 위엄을 더하고, 테두리 안쪽 면에 꽃무늬를 그려 넣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천안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이 현판을 지난 8월 입수해 4개월여 동안 기초 조사와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이번에 내놓는다.
만동묘(萬東廟)는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은 뒤 제자 권상하에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병자호란 때 의를 지킨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것을 당부해 건립한 사당이다.
대의명분과 심성을 중요시 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사상이 깃든 만동묘는 그동안 수많은 수난을 겪었다.
1776년 정조 즉위 뒤 사액(賜額)을 당했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으나 1874년 고종의 명으로 부활해 일제강점기 항일정신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37년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를 쪼아낸 데 이어 1942년 중수한 건물과 위패, 제구 등을 모두 불태워 철거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만동묘중수기현판'은 충청도 유림이 만동묘를 중수한 뜻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던 충청도 유림의 올곧은 춘추대의 정신을 담은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국립청주박물관 관계자는 "앞으로 정밀한 보존처리와 분석 작업을 마친 뒤 지역 문화의 자긍심을 알리기 위해 이 현판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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