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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의지리 풍천임씨열녀문(靑山面 義旨里 豊川任氏㤠女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의지리 풍천임씨열녀문(靑山面 義旨里 豊川任氏㤠女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16. 06:21

 

 

청산면 의지리 의동마을에 있는 풍천임씨열녀문입니다.

의동마을 회관에서 의동저수지 쪽으로 길을 가다보면 좌측 야산 기슭에 수로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접근성이 불편합니다.

 

 

 

정려문 안에는 후대(1984년 1월)에 세운 정려비와 더불어 정려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정려문안에 정려편액에는 증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양한신처정부인풍천임씨정렬지려(贈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梁漢臣妻貞夫人豊川任氏旌烈之閭)라고 적혀 있으며 상지49년 2월에 명정되였습니다.

 

 

 

풍천임씨정려비에 쓰인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백이십연년전에 옥천 갯골에 할아버지께서 사셨는데 할아버지께서 병환이 나시어 할머니 풍천임씨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올렸으나 효력이 무효하여 걱정근심으로 계시던중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잉어를 잡수시고 싶다고 말씀하시어 할머니께서는 접동강으로 가시니 때는 엄동설한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잉어를 구할 길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시어 목욕제계한후에 강의 얼음위에서 수일동안 기도를 드리던 중 하루는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 그 곳을 향하여 보시니 잉어 한마리가 어름위에서 펄펄 뛰는 것이 였다.

 

 

 

이에 할머니는 잉어를 잡아 치마에 싸가지고 집으로 오시어 고아드렸으나 효력이 없으시고 그 후 몇 일 되지않아 할아버지께서 풋대추가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시니 할머니께서는 그말을 들은 즉시 대추나무 밑에 가시어 수일 정성기도를 드리시다 대추나무를 바라보니 지성이 감천하시어 풋대추가 달려 따다 드렸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할머니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말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할머니께서는 고기를 전혀 잡수시지 않으시고 할아버지 산소옆에서 음막을 치시고 시묘 사시며 삼년을 받드신 후에 제사 나는날 복끈으로 목을 매여 돌아가시니 이 아니 열녀가 아닐소냐 그 소행이 널리 알려져 사방에 계시는 선비들께서 이 행렬을 나라에 상소하니 나라에서 규장각 정삼품벼슬을 하사 하시였다.

 

 

 

그 후에 열녀각은 옥천 연봉정에 건립하시어 근 백사십여년을 보존하여 오다가 경부선 철로를 놓게되여 보존키 어려워 청산 의동에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서기 1984년 병인1월 / 육대손 양승구 라고 각자되여 있다.

 

 

 

 

풍천임씨는 이원면 포동리 갯골에 살던 양한신梁漢臣의 부인이다. 풍천임씨는 남원양씨 집안에 시집을 와 남편에게 순종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으나, 안타깝게도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었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병석에 있는 동안 그녀는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온갖 약재로 시탕하고, 한겨울에도 잉어·대추를 구해 몸보신을 시켰으나 효험이 없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삼년간 시묘하고, 상을 마칠 때까 지 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삼년상이 끝나는 날 상복 끈으로 목을 매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사실이 알려져 지역 선비들이 상소하여 1772년(영조 48) 풍천임씨의 남편 양한신은 규장각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고 그녀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원면 포동에 열녀문이 세워졌다.
이후 열녀문은 일제강점기 경부선이 개설되면서 현재의 청산면 의지리義旨里 로 옮겨졌으며, 1986년 1월에 양씨 문 중에서 열녀문 안에 비석을 새우고 기 와 등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현재 열녀 문 안에는 ‘증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양 한신처정부인풍천임씨정렬지려贈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梁漢臣妻貞夫人豊川任氏旌烈之閭’라는 편액과 전면에 ‘증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양한신처정부인풍천임씨정렬지려贈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梁漢臣妻貞夫人豊川任氏旌烈之閭’, 옆면과 후면에
풍천임씨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