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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죽리 원평(원터)(曾坪邑 竹里 院坪(원터) 본문
원평리 (院坪里) : ㆍ원평(院坪) : 죽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원평(院坪)’으로 불리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중종 25년, 1530) 청주목(淸州牧) 역원조(驛院條)에, 북쪽으로 37리에 포원(蒲院)이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 포원이 있던 곳이 ‘원평’이라는 것이다.그러나 ‘포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일제강점기 청주군 산외이면에도 ‘원평’이란 마을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포원’은 청안군 남면이 아니라, 청주군 산외이면의 ‘원평’일 수도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청안현 역원조에, “서쪽 15리에 장후원(長候院)이 있다.”고 했는데 방향은 다르지만 이 ‘장후원’이 원평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고유지명 없이 ‘院坪’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원(院)은 고려ㆍ조선시대에 지방으로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나라가 운영하던 숙식시설이다. 이 원의 운영을 위해 일정한 토지를 배속했는데, 이것이 원평(院坪)이다.
원평(院坪)은‘원(院)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조선시대에, 청안에서 청주로 가는 길목에 원(院)이 있었다. 청안 현감(縣監)이 청주감영(淸州監營)으로 오가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세종임금이 초정(椒井)에서 삼 개 동안 머물면서 안질을 치료할 때, 세종에게 매일 문안을 드리기 위해 청안의 현감이 초정을 오갔으며, 이곳의 원에서 관복을
정제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 뿐만 아니라 청안의 남창(南倉)도 있었기 때문에 매우 번화했다고 한다. [증평군지]
죽리(竹里)는 본래 조선시대때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에 속해 있었다. 남하리와 남차리 중간에 있으므로 중리(中里) 또는 대나무가 많다하여 죽리(竹里)라 했다.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기록에는 충청도(忠淸)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에 27개의 동리(洞里)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죽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대술리(大述里), 중리(中里), 비조리 (飛鳥里), 서원리(書院里) 등 4개리가 있었다. 그 뒤 죽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 면인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서면(西面), 근서면 (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됐다.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
一覽)』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대술리(大述里)가 대수리(大水里)로, 비조리(飛鳥里) 비학리(飛鶴里)로, 서원리(書院里)가 서동리(書洞里)로 바뀌었다. 또한 모평리(牟坪里)와 원평리(院坪里)가 새로 생겼다.1914년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모평리(牟坪里), 대수리(大水里), 중리(中里), 비학리(飛鶴里), 원평리(院坪里), 서동리(書洞里) 일부와 청주군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월경리(越境里) 일부를 병합하여 죽리라 해서 괴산군 증평면(邑)에 편입됐다.1990년 12월 31일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죽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에 편입됐다.
원평(원터)는 중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이곳에 위치한 포원(蒲院)으로 인하여 원평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원(院)은 고려·조선시대에 지방으로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나라가 운영하던 숙식시설이다. 이 원의 운영을 위해 일정한 토지를 배속했는데, 이것이 원평(院坪)이다. 중종(中宗) 25년(1530)에 완성된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찬지리서(官撰地理書)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청주목(淸州牧) 역원(驛院) 조(條)에 포원(蒲院)이 기록되어 있다. 포원은 청주목에서 북쪽으로 17리에 소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 할 때 청주군 산외이면 (山外二面)의 월경리(越境里) 일부를 병합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월경리에 현재의 원평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포원은 17세기 전반에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략 인조(仁祖) 10년(1632) 전후해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호서승람(湖西勝覽)』청주목(淸州牧) 역원(驛院) 조(條)에 포원이 이 때에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17세기 전반에는 그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포원 터의 위치는 원평리에서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 위치한다. 원평 마을 노인회관 서쪽 삼보산 초입에 있는 소나무 재배지가 포원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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