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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괴동리백운암(嚴政面 槐東里白雲庵)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괴동리백운암(嚴政面 槐東里白雲庵)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6. 21. 13:06

 

 

 

 

 

 

 

 

 

 

 

 

 

 

 

 

 

 

 


  • [정의]
  •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찰.

  • [개설]
  • 백운암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충주군 북쪽 태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사원 입구 남쪽에 경종대왕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백운암의 법당 안에는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이 있는데, 단호사 철불좌상 및 대원사 철불좌상과 함께 충주의 뛰어난 철불좌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 [건립경위 및 변천]
  • 빌미산 자락에 위치한 백운암은 조선 후기 왕실의 무녀인 진령군(眞靈君) 여대감(女大監)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웅전에 안치된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에 관련한 설화도 전해진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충주 지방으로 피신 왔을 때 한 무당이 곧 환궁하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예언대로 되자 무당을 서울로 불러 진령군 여대감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하루는 여대감의 꿈에 백의철불(白衣鐵佛)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안치해 달라고 하여 절을 세워 백운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886년 진령군이 인법당(因法堂)을 지은 이후 법당과 요사를 함께 사용하다가,

    1977년 요사를 두어 법당과 요사를 분리하고 법당을 대웅전으로 편액하였으며, 1991년에는 삼성각을 짓고 요사를 수리하여 현재의 가람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999년 주지 진송(眞松)이 국비를 지원받아 대웅전을 재건하였고, 2002년 축대 보수는 물론 도로 공사를 통해 비포장길이었던 사찰의 진입로를 보수하였다.

  • [현황]
  • 백운암의 시설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성각 및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 수는 300여 명이다.

  • [관련문화재]
  • 2007년 10월 24일에 보물 제1527호로 지정된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호사 철불좌상, 대원사 철불좌상과 함께 충주 지역의 정치력과 안정된 경제,

    문화적 기반 위에서 행해진 불사들로서, 지역적인 특징과 함께 불상 제작 양식의 변천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백운암에는 1888년에 제작된 탱화 3점, 1965년에 제작된 탱화 3점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반자(飯子)가 1점 전해지고 있는데

     ‘을해이월십일보림사조납반자일구중십사근□□진사이중형(乙亥二月十日寶林寺造衲飯子一口重拾四斤□□進士李仲衡)’이란 명문이 있다.

     

    날이 많이도 무덥다.

    주위에 있는줄 알면서도 다음 다음을 기약하다보니

    이제사 발길을 할수 있었다

    경종대왕 태실을 들려 뜨거운 한낮의 햇볕과 친구하며 찾은곳 백운암

    고즈넉한 분위기에 들려오는 산새소리가 뜨거운 한낮을 달래주고 있다

    샴성각과 대웅전 요사채로 이루어진 조용한 절집...

    대웅전 안에는 근엄한 철불이 밖을 바라다본다...

    짙푸른 녹음아래 시원한 감로수 한잔 마시며 발길을 돌리니

    조용한 산사에 산새울음소리 홀로 가득하다

     

    ..............

     

    백운암은 명성황후가 임오군란때 충주땅에 와서 피란했다는 갖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예를 들면 노은면에 위치한 국망산 이야기나 또 가신리에 자리한 이음성집(명성황후피란지)등이 있다

    명성황후가 피난 도중 하도 울적하여 이곳 저곳을 왕래 하다가 이곳 백운산 밑에 파평윤씨로 유명한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

    일부러 초라한 행색을 하고 신수점을 하러 왔노라 하며 방문을 하니 윤씨가 힐끔 보더니 달려나와 굴복배례를 하는것이였다

    황후는 사실이 폭로되자 국사의 귀추를 물었더니 윤씨는 신중히 점궤를 풀고나서 모월모일에 환궁하게 될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과연 그날이 왔는데 북방에서 온 특사에 의해서 희소식이 전해져 환도를 하게되니 이 무당의 명성이 조야에 떨치게 되였다

    그후 황후는 윤씨를 궁내로 불러올려서 칭송을 한다음 진령군여대감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윤씨는 하향후에도 이 백운산밑에 살았는데 하루는 현몽의 백의철불이 나타나서 이 자리에 절을 짓고 봉불하라는 분부로

    새로 큰 절을 짓고 이름 지은 것이 이 백운암이다.

    그 당시에는 이 부근에 많은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하나의 예가 대지국사비와 같이 서 있던 억정사 였다

    지금도 이 부근 전답에서는 고려시대의 와편이 많이 출토된다고 한다.[장기덕...중원향토기]